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첫눈에 반한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적어도 그를 보기 전까진 그랬었다. 사실 첫눈에 반하기 위해서 상대의 외모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외모만 보고서 그것도 한번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게 도무지 내겐 사랑에 대해 사춘기적 환상에 대한 반응일 뿐이였다.

하지만 그 유치한 반함을 사춘기를 훨씬 지난 늦은 나이에 느끼게 됐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틈에 섞여 그와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유치한 외모에 대한 환상위에 다시 후한 점수를 주어 역시 이 사람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스스로 안심했고 대견해했다. 그 때부터 나의 정신적 혼란과 유치한 발상은 시작됐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그의 저런 행동은 나에 대한 호감인지 무관심인지 내 두뇌는 지금까지 살아온 어느 순간보다도 복잡하고 빠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이제 과부하가 걸려 회사일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됐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됐다. 날 이런 카오스로부터 구제해 줄 전능한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든걸 명쾌하게 대답해줄 현명한 선지자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자서전 적인 글이다. 지극히 평범한 연애담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밖에 볼 수 없는 특이하고 놀라운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프랑스인 저자와 국적이 틀린 나로서도 충분히 공감을 할 만한 아주 평범한 러브 스토리이다. 도대체 그토록 흔한 사랑 이야기에 대해 한 권의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냈다는 데 대해 우선 놀라웠다. 첫 페이지부터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저자의 이야기가 나의 경우와 너무나 똑같아서 그 반가움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와 똑같은 갈등과 안절부절 못하는 당황스러움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냉정할 정도의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곁들인다. 낯선 두 사람이 만나서 우연챦게 사랑을 하게 되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둘만의 암호와 비밀을 갖게 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행복감에 두려워하고…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권태로워하고 어느날 갑자기 닥친 이별에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고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또 어느 순간 사고처럼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

사랑의 일대기와도 같은 이야기를 어쩌면 그렇게 세세하게 할 수 있는지.. 그 사랑의 변화에 읽는 내내 무릎을 치며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탁월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감정 변화 곳곳에 냉철한 분석을 하는데 있다. 철학과 역사와 종교등의 박식한 해설을 곁들여 그 의미를 분석하는 데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고 난해하지 않다. 오히려 철학자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젊은이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사랑에 지쳐 황폐해진 마음을 유쾌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4년간의 긴 첫사랑을 했었고 헤어지고도 꼭 같은 기간만큼 잊지 못했었다. 4년의 긴 시간의 사랑이나 1년여의 저자의 사랑이야기나 그 감정의 변화와 자질구레한 연애담들이 어찌 그리 비슷할 수 있는지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단순한 것 같으면서 또 한편으론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처럼 그 감정의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분석한 글들을 보면 한낱 호르몬의 장난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책에선간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때문으로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면 우린 왜 그토록 사랑 때문에 애닳아하고 아파하고 세상을 다 산듯한 절망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한편으론 사랑에 대해 속시원함이 있었다. ‘사랑.. 그거 별거 아니군..’ 하지만 첫 눈에 반한 그에 대한 사랑이 채 시작도 하기전에 어이없게 끝나버렸을 때의 허탈감과 쓸쓸함을 지워버리기엔 역부족이였다. 사랑을 아무리 냉정하게 철학과 이성으로 분석하고 그래서 이젠 무지하고 막무가내인 채로 사랑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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