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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제국
앙리 프레데릭 블랑 지음, 임희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선뜻 집은 건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다. 잠의 제국이라… 요즘 들어 불면증에 시달리는 내겐 꽤나 유혹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턴가(아마도 여러가지 일들이 꼬이고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할때였겠지..) 새벽이 되도록 잠을 들 수 없을 때가 많다. 겨우 겨우 잠이 들더라도 그건 단지 꿈의 공장에 들어서는 것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쯤 난 몇 편의 말도 안 되는 뒤죽박죽의 드라마에 주연이 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조연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중 반 이상은 기억도 안나지만…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 드라마들도 잠이 깨어도 내 머리가 개운하지 않게 하는데는 큰 몫을 하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늘 들곤 한다. 도대체 김이 모락거리는 적당히 뜨거운 욕조속으로 들어가듯 편하게 잠을 잘 순 없을까? 자는 내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온전히 잠에만 푹 빠져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다시 세상을 보게 된 데 대해 산뜻한 감사함을 느낄 순 없을까? 이 책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 소박한 바람을 이 책은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주인공은 잠 연구가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며 잠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어찌보면 참 부러운 직업같기도 하다. 그는 잠이란 단지 하루 일과의 휴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수면시간내의 뇌의 활동을 의식의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린 존재 정도로 무시할 게 아니라 의식과 대등하게 존중해 줘야 하는 무의식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자는 내내 꿈을 꾸지만 나와는 틀리게 그 꿈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즐긴다. 그리고 꿈 속에서 그와같은 잠 연구가인 과거의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잠 연구가를 불경시하고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잠 속으로 들어온 성직자에게 쫓기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단순히 주인공의 정신착란적 발상인지 진짜로 잠의 제국에서 존재하는 일인지 우리 자신까지도 모호하게 만든다.
종일 잠을 자며 연구하는 결과로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홀대 받는다. 그러한 주인공을 통해 또는 민중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까페 주인의 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일장 연설한다. 흔하게는 한 페이지 분량으로 심하게는 서너페이지 이상으로 반환경적이고 물질 만능적이고 비인격적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한다. 이 긴 연설을 듣는 건 심각한 인내심이 요구되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에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데 꽤 좋은 역할을 했다. 어쩌면 주인공이 몇 페이지에 걸친 일장 연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청중들은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다는 설정은 씁쓸하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나도 그와 같은 청중이였기 때문이다. 다 아는 뻔한 얘기를 이렇게 길게 주절거리는 건 종이 낭비 아닐까? 이 작가는 이런 식으로 쓰면 책 판매량이 줄어들 거라는 당연한 상식도 모르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으로 한심해하며 덕분에 지루함으로 잠들 수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 주변의 냉대와 정신병자라는 손가락질을 참아가면서까지 사람들이 무시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주인공과 도대체 몇 명이나 귀 기울여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작가에게 나도 모르게 다가가게 됐다.
내 불면증의 치료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꿈꾸기를 부담스러워하고 거부하게 되진 않았다. 어쩌면 오늘 밤 내 잠의 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무슨 얘기를 건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