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살아가면서 간혹 내 살아온 뒷모습을 찾아헤매거나 추억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횟수나 강도는 나이 듦에 비례하는 것 같다. 입시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학교를 가지 않았을테고 그랬다면 8년이나 긴 연애를 하지 않았을텐데.. 결국은 맺어지지 않을 사랑으로 시간낭비하지 않았을테고 그때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있을지도 모를텐데… 그리고 그 때 그 술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흔들리긴 했지만 그만두진 못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방향을 바꿀 용기를 갖진 못했을텐데.. 결국은 그냥 다니는 편이 지금 생각으론 잘 한 짓이였는데..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을 종종 하며 한숨을 내쉬지만 어쨌든 삶이라는 건 그런식으로 흘러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으로 결말을 짓곤 한다. 그게 단지 우연이였는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에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뿌리내리지 못한 수초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닐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의식하지 못할 뿐 그 뿌리는 우리 삶에 비집고 들어오는 수 많은 변수들에 의해 스스로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 자극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 가는 순전히 우리의 의지에 따른다.

아무튼 내 인생이 우연챦은 사람과 사건들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잘 갈때도 있었지만 이 책의 삭스에 비한다면 참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편이다. 재능이 충만한 작가에서 결국은 테러리스트가 돼서 쓸쓸한 죽음을 자초하는 삭스의 삶은 그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인생에 끼여들었던 인물들과 사건들은 충분히 그럴수도 있을법한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의 지성과 양심이 너무나 첨예하게 살아있어서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사건들이 그의 인생에 지워지지 않을 표식을 새겨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읽는내내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꼈다. 삭스의 둘도 없는 친구인 피터의 심정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가 술에 취해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운 좋게 살아났던 사건이나, 완전한 우연으로 살인사건에 꼬이게 됐을때도 그저 그럴수도 있었다고, 평범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내버려 뒀음 좋았을 텐데.. 살아가는 건 다 그런거라고 적당히 현실에 동조하고 타협하면서 안정과 쾌락을 누릴수도 있었을텐데.. 그럼 사랑하는 부인이나 친구들의 곁을 떠나 세상에 오직 홀로 떠돌며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친구의 책에 가짜 서명을 하지도 않았을텐데..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도 않았을텐데..

하지만 어쩌면 삭스 자신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지극히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죽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내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건 삭스처럼 완벽하게 스스로의 요구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오히려 나 자신보다는 세상의 편견과 거짓에 더 귀기울이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삭스처럼 삶을 쥐고 흔들만한 사건들이 더 이상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므로 나의 삶은 지금과 비슷한 정도로만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종종 뚜렷이 알 수 없는 허전함과 불만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진정한 요구를 묵살한 덕분이겠지만 또한 그 선택이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사는 최선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그리고 또 지금처럼 잔인하게도 삭스의 삶에서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