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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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그 사전적 의미와는 별도로 지구상 인구의 수만큼 종류가 다양할 것이다. 적어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각자의 성격이 틀리듯이 그들의 이상향도 다른 모양으로 꿈꾸어질 것이다. 하지만 슬픈 일이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은 그저 꿈을 꿀 수 있다는데 만족해야만 한다. 그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가 제한되지 않고 지적 탐구심이 계속되는 한 그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어느 먼 미래의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세상을 꿈 꿀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의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1932년 헉슬리는 그의 신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2500년경의 이 놀라운 세계는 태내생식대신 배양시험관에서 필요한 계급에 필요한 양만큼의 인간들을 배양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부모도 없고 결혼, 가정도 없다. 철저한 계급으로 분리되어 하층 계급의 태아를 배양할때는 일부러 약간의 독극물을 투여하고 산소를 제한하는 등으로 지능지수를 낮게 하고 외모도 왜소하고 추하게 만든다.

또한 수면시 교육법이라는 심리학적 기술로 끊임없이 쇄뇌하여 자기 계급에 절대 불만없이 잘 적응되도록 한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라는 철학으로 극단적인 자유연애가 장려되며 잠시의 우울과 걱정은 소마라는 묘약으로 해소된다. 이 사회에서는 노화도 없고 불안도 없고 고통도 없다. 모든 구성원들이 지극히 만족스럽고 명랑하게 일평생을 살다가 죽음도 그 일부로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아! 이 멋진 신세계여!’ 너무나 완벽하고 놀랍지 않은가?! 그야말로 우리가 여태껏 꿈꿔왔던 바로 그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사회에도 반발하는 몇몇이 존재하며 역설적이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들에게 동조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 진정한 자유란 없는 노예화된 사회라는 것이 이 완벽한 유토피아를 거부하는 반론이다.

하지만 우리가 책 속의 그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세상에 익숙한 때문은 아닐까? 애초에 헉슬리의 신세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지금의 사회를 역겨워하며 거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것이 인간을 위한 진정한 사회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기본 유전자가 거의 비슷하다면 태어나서 사회화되면서 바뀐 그 모습이 인간 그 자체의 가치이고 참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항상 우리의 현재에서 우리의 시선으로 다른 것을 판단하고 가치 매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됐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거기서부터 인간의 지적 능력이 발전하고 또 이처럼 놀라운 책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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