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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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문구에 나열된 화려한 수상 경력과 각종 찬사는 마치 간증과도 같아서, 덮어놓고 구매하긴 했다만 처음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거기다 (다소 편견 어린 시선이지만) 추리나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강렬한 강한 분홍빛이라니. 잔혹한 범죄를 떠올리게 만드는 빨강도 아니고, 고독하게 범인을 뒤쫓아야 하는 주인공의 냉소를 담은 검정도 아닌 진분홍색의 표지가 이제껏 읽었던 범죄 소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책을 살 때 되도록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지 않고 구매하는 편이라 다른 독자에 비해 책장을 펼치기 전, 책에 대해 아는 것이 비교적 적다. 그렇기에 살갗에 새겨진 것처럼 죽죽 늘어진 표지 제목에 기묘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딱히 좋아하는 디자인은 아니지만, 어째서 이런 제목과 디자인이 선정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하간, 포의 시선을 따라가기 이전부터 <퍼핏 쇼>만큼 내게 신경 쓰이는 작품은 없었다.

  잠깐 옆길로 새서, 이 작품이 내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퍼핏 쇼>2000년대를 풍미했던 플래시게임 제작사 사바켄(Sarbarkan)의 추리&미스테리 포인트 앤 클릭 게임, <아케인 미스테리>에 등장하는 환상열석 에피소드의 위태로움과 명쾌하지 않게 풀리는 사건, 그럼에도 흥미를 자아내는 사건 전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또한 같은 제작사의 <미스테리 박물관> 시리즈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개성이 뻔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경이로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처럼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개성에 끌려다니거나 하지 않고 적절한 존중 아래 훌륭한 시너지를 발휘하여 작품을 이끌어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좋아했던 만큼, 포의 심증에 크게 좌우되는 전개 방식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친근하고 반갑기도 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의도된 연출인지는 모르나 재미있게도 <퍼핏 쇼>의 사건 흐름은 이 작은 기묘함에서 시작된다. 과거 있었던 불미스러운 실수로 인하여 정직 처분 중인 전 경위 워싱턴 포. 고인돌이 원형으로 배치된 모양의 유적인 환상열석에서 연달아 불에 태우고 잔인하게 고문한 시체가 발견되고, 그중 세 번째 시체에서 칼로 깊게 새겨진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그의 이름과 함께 ‘5’가 적혀있었기에 그는 곧 다섯 번째 표적으로 예상되고, 자신에게 씌워진 의심과 범인의 위협 아래에서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은 직장동료들처럼 편협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독자들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이 작품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사건의 전환점을 알아채는 계기가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 작가 어디서 몰래 사람이라도 죽인 거 아니야? 왜 이렇게 현실성 있지?’라고 느꼈을 만큼 작가 개인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 실제로 포를 미행하는 스토커처럼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느 영국 시골의 안개와 적대적인 시선, 아웃사이더로서의 고독을 끊임없이 내 것처럼 맛볼 수 있었으며 현장에 복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던 어느 중년 경찰은 어느새 범죄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전개를 따라가는 내내 거슬렸던 등장인물이 모순되게도 말미쯤엔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책을 덮고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며 이것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기도 했다. 본디 훌륭한 작품이란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까지 사로잡는 것이라던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로잡힌 것을 보면 그 화려한 수상 이력이 납득간다. 앞서 묘한 위화감을 언급하며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비단 포에게만 국한되는 표현이 아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연 중 하나인 틸리 브래드쇼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판에 박힌 듯 평면적이었던(셜록 홈스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장르를 불문하고 천재라고 한다면 현실에서 보기 어려우면서 행동 하나하나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인물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간의 천재 등장인물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점점 배우고 진화하며, 종래에는 그를 진심으로 친구라 여기고 데이터가 아닌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를 구하러 오토바이를 모는 발전을 보인다. 그렇기에 위기를 넘기고 병실에서 잠든 그들을 보게 될 때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외골수 짓만 하는 중년의 상급자와 온실 속 화초로 자라 사회성이 떨어지지만 순수한 천재 여성의 콤비는 언젠가는 세상에 나와줬으면 싶었던 조합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매력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자연스럽다는 점에 있다. 엽서의 숨겨져 있던 뒷면이 드러나며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계기, 범행이 전개된 방식과 그 이유는 모두 현실에서 있을법한 일들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포의 반응과 범인의 반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그들의 대화는 현실과 다름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씁쓸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작가가 현실의 앞면과 뒷면을 면밀하게 포착하고 이야기로 가공할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직시해 칵테일처럼 잘 조절했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작품의 서술 방식이나 전개가 이전에 전혀 없던 새로운 방식은 아님에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이 마무리되는 방식 또한 환상적이다.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독자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적절한 여지를 남겼고, 마지막으로 포와 브래드쇼의 행보를 미치도록 궁금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포는 범인의 연극에 등장하는 주연에 불과했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그는 스스로 우리 앞으로 걸어나와 커튼콜에 응하는 주연 배우가 되었다.

-

참지 못하고 근무 중 휴식 시간마다 몰래 창고에 숨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책이다.


그는 브래드쇼를 생각했다. 마르고 근시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어리둥절해하던 모습을. 브래드쇼가 섑 웰스 라운지에 앉아 있는데 그 술 취한 머저리들이 추근대던 때를. 그때 브래드쇼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포가 그들을 쫓아냈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그렇게 군 까닭은 브래드쇼가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서투른 외면 안쪽에 뭔가 특별한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 드러낸 일이었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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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그리스 로마 신화 대모험 3 - 신들의 왕 제우스 설민석의 그리스 로마 신화 대모험 3
설민석.남이담 지음, 이미나 그림, 김헌 감수 / 단꿈아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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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하면 설쌤, 설쌤하면 역사죠! 수많은 등장인물과 휙휙 바뀌는 지명(크레타라던지, 이오 섬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신들의 수는 아이들에게 그리스신화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듯 해요ㅠ 하지만 설쌤과 함께하는 대모험을 통해 제우스가 어떻게 최고신이 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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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위로 - 답답한 인생의 방정식이 선명히 풀리는 시간
이강룡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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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알려주는 과학도 좋지만, 전공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 정도는 알겠지? 싶은 허들이 있더라구요. 그런 점에서 과학을 같이 공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 정보 전달이라 하더라도 거부감없이 술술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찰떡같은 인문학적 비유는 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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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시즌 2 - 일러스트 한 장으로 즐기는 추리 게임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2
모데스토 가르시아 지음, 하비 데 카스트로 그림, 엄지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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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평소처럼 알라딘에서 게임북이나 추리 장르를 뒤져보다 발견하게 된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표지가 너무 매력적이라 속는셈치고 한번 구매해보았다.

그리고 성공했다!

잘 알아보지 않고 과감히 질렀을 때 성공하는건 책뿐이라지만 넷플릭스 컨텐츠, 트위터를 이용한 프로젝트이자 픽션 스레드, 방송의 작가인 모데스토 가르시아는 사건의 배경을 어디로 옮겨놓아도 몰입하도록 만들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지하실 냉동고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시체나 죽은 의사, 크루즈선의 수영장에서 발견된 거부의 시신, 공항 출국 대기 중 죽은 한 여성 등 국적과 장소, 상황을 자유롭게 넘나들기에 그만큼 상상력과 추리를 펼칠 요소가 무한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발상을 뒷받침하듯 지문이나 타일, 메모, 발자국 등 그릴 수 있는 요소는 죄다 그려서 실제 사건 현장에서처럼 한 가닥의 선이 상황을 뒤집는 반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며 과연 어떠한 감정이 '살인'까지 갈 것인가? 라는 추론을 해보는 과정도 너무나 재미있었다.


뭣보다 내가 가진 모든 통신 수단,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 권의 책인데도 친구나 가족들과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적인 측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친구들끼리 풀었을 때에는 한 개의 사건이었지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인근에 사는데도 갑자기 오싹해졌다며 집까지 데려다주어야 했다😅


그것뿐일까? 가는 곳마다 책 안좋아하더라도 이 책은 꼭 읽어보라고 권해서 출판사에서 나온거 아니냐구 묻는 동호회 분들도 계셨다. 겜 좋아하냐구.. 물어보셔서 앗 내가 또 과몰입 오탁구 짓거리를... 싶었다 하지만.. 그치만 이 작품은 내게 그런 과몰입을 가져다주었단 말이여...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가 재미있다고 한 마디만 들으면 내 칭찬처럼 기뻐서..ㅠㅠㅠ

오히려 친구들한테 왜 이책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을까? 물었더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나머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큼! 아무튼


1권을 살 당시에는 모데스토 가르시아가 방송 작가라고만 알아서 후속작 안 내주나~ 2권 내줄 맘이 있을까~ 등등 이 분 안돌아오시면 어쩌지라는 맘앓이를 했었더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텀블벅 펀딩 광고를 보게 된 2023년 2월 15일.

나는 이 소식을 나의 동지들에게 서둘러 전했다.

우리 모데스토 가르시아 감금위원회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2> 결사위원회는 흥분에 찬 상태로 텀블벅 퍼센테이지(%)가 바뀌어가는 것을 하루하루 지켜보게 되는데. . . .

.

.

왔나?

..

아.. 아니네 엄마가 쥐포 시켰네

.

.

.

왔나..?

.

.

왔다!!!


이러한 인고의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오게 된 <당신은 사건 현장에 있습니다 2>

3 나올 때까지 야금야금 읽으려고 되게 조심스럽게 읽고 있는 중이다

직접 풀어가는 재미가 중요한 책이라 스포가 될까 신중하게 고른 한 장만 리뷰에 올려보려고 한다

텀블벅으로 구매한 책에서는 예약 특전으로 사건 수첩을 준다.

(나는 사건 수첩을 아끼기도 했고, 내가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 외피가 가죽이라 그런지? 좀 더 탐정 조수가 들고 다니는 느낌이라 여기에다 풀었다.) 800? 8000 퍼센트 달성 기념으로(기억 안남...) 돋보기도 함께 왔는데

요게요게 물건이라 책에다 갖다 대가면서 풀면 또 탐정 기분 지대로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장의 그림 속에도 엄청난 디테일이 숨어있어서 돋보기 쓰면 찾기도 편한 것 같고 내 머리는 쓰지 않고 있지만 뭔가 똑똑하게 파고드는것 같고 암튼 그렇다.


요런 퀴즈도 있구... 가려놨지만 스마트폰 이용해서 푸는 신문물 퀴-즈도 있다

스포가 1도 안되는 고뇌의 흔적... 진짜 나는 퀴즈를 풀때 혼자 이상한 풀이로 가는 경향이 있다..


스마트폰과 유튜브, 틱톡 등 숏 컨텐츠의 발달로 사람들이 가진 집중력과 인내의 한계가 짧아지고 있다. 물론 도서 정책이라던지 책을 구매하는 데 영향을 줄 법한 상황도 고려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책에 대한 관심이 다른 미디어로 옮겨가고 있고, 결과적으로는 독서량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책, 그러니까 개별 장르가 살아남을 방향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순문학은 교과서 등 방과후 교육이나 교육적 프로그램과의 연계가 불가피한다면 이러한 추리 장르는 게임북과의 결합을 통한 다각적 흥미 유발은 물론이고, 스마트폰 사용이나 오감을 이용한 퀴즈를 집어넣어 넷플릭스의 인터랙티브 무비처럼 끊임없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건 모르겠고 그냥 작가분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거 하시면서 이 시리즈 계속 내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입소문타서 대한민국 국민이 한 권씩 사면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저씨처럼 '오! 한국에 독자가 꽤 되는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집필 활동 왕성하게 해줄지...

아닌가? 아님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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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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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악이라는 말이 있다. ‘짐짓 악한 체한다라는 뜻으로 보통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논할 때, ‘성선설이나 성악설처럼 타고나길 선하거나 악하지, 부러 악한 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며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좀처럼 본심을 파악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정치나 사건·사고에서는 때때로 빛과 그림자처럼 위악이 필요한 예도 많아졌다. 조선 후기만 보아도 노론의 영수이자 정조 독살설에서 유력 용의자로 치부되었던 심환지가 나중에 발견된 어찰로 인하여 사실은 정조의 뜻대로 정국을 움직이도록 협력했던 자로 밝혀진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풍조는 사회 계급의 위로 올라갈수록, 해당 국가나 시대의 정세가 불안정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치열해진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역사를 평가할 때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시간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인물이 행동한 명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민주화 운동 대목이 그러한 부분이요, 당대에는 오랑캐에게 굴욕스러운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 축출의 한 가지 명분이 되었던 광해군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지나며 기록이 사라지고, 조작되고 도덕 기준이 변하여도 꾸준히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도 있다. 미합중국의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은 무능한데다 부패했고 사생활도 깨끗하지 못해 역대 대통령들을 놓고 인기 투표를 시행하면 항상 최하위에 든다고 한다. 우리는 역사도 길고 그만큼 수난의 세월도 장장(長長) 하니 한국사에서 최악인 지도자를 뽑으라면 1, 2위를 두고 다툴 사람도 많다. 특히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은 실리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다소 황당해 보일 수 있기에 조선시대 왕들은 심심찮게 불려 나오는 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차치한다 해도 변호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는 법이다. 먼저 숭정제처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그리고 구하고 있는 명장을 스스로 위기에 빠뜨린 선조가 있다. 근대화 노력은 했다지만 권력욕에 비해 능력이 심히 모자라 중요한 시점에서 나라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게 만든 고종도 종종 거론된다. 특히 인조는 청나라의 침공을 앞두고 반정으로 추대된 사례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호란을 자초한 치명적 실책을 무수히 보였으며 며느리인 민회빈강씨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훗날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예송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오죽하면 선조보다도 최악의 왕이라고 비판받을까? 사실 선조는 몽진과 그 자신의 시기만 제외하면 긍정적 평가의 여지라도 있지만 인조는 백성들의 생활은 생활대로, 나라의 위기는 위기대로, 그 와중에 권신들의 횡포는 감싸주는 암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인조 재위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으로 정점을 찍는다. 여기에 자신이 아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좋아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인조를 존경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조 1636>은 그러한 왕과 전쟁에 대하여 조선뿐만 아니라 명과 청, 그리고 인조반정이 성공하기까지의 전후 관계를 연도와 지도, 사료를 들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필자는 가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 위키 페이지에 접속해 역사 인물의 행적을 눈으로 좇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인들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역사를 가볍게 읽기 쉽도록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의 재미와는 별개로, 인조가 펼친 정치는 위급한 상황에서 너무나 태평하고 정세를 모르는 아둔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백성들 대부분이 죽거나 전리품으로 전락해 타국의 병졸들에게 농락당하는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호란을 겪어가면서도 친명 배금을 찾는 모습이나,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기 이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까지 하는 행태는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 대해 집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읽는 내내 인조 시대 권력층처럼만은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심어주었다. 앞서 언급했던 선조와 영조는 단점이 두드러지어서 그렇지, 그들이 저지른 일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른 방면에서는 잘한 일도 있어서 그들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인조는 정치적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정책에 대한 명분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왕이나 그 밑의 요직에 있는 신하들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비겁하게 움직였다. 정치적 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술하면서 득보다는 실이 컸고 권력 유지를 위한 명분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자신 대의 왕 자리를 지키려다 추후 자신의 아들, 손자 대까지 위태로워지는 무리수였다. 어쩌면 우리는 현재에 태어나 그런 지도자로 인해 고통받지 않고 편안하게 교훈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른다.

  흔히 인조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쪽이 치달으면 다른 한쪽은 최악으로 묘사되며 시소처럼 위아래를 오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왕뿐만 아니라 만백성이 그 시대의 증인 아니겠는가. <인조 1636>은 인조가 왕이 되는 계기에서부터 전개를 시작하지만 정작 인조보다는 각 전쟁과 사건의 배경과 그를 접한 사람들의 행위, 그리고 거기에 얽혀있는 이해타산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특히 1등 반정공신인 김류와 이귀는 이 책에 인조와 비슷하게 주목받고 있으며 반정에서 앞장서는 역할을 맡았지만 2등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모함까지 받아 그것을 실행해버린 이괄의 난에 대해서도 판세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어떠한 책을 좋아하게 될 때는 독자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이를테면 고전으로 유명한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엘리자베스에게 시종일관 차갑게 대하던 다아시가 그녀의 충고로 개심하고 그녀를 위해 몰래 노력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사실을 기술하는 역사 서적이라도 다를 바 없다. 인간이란 무릇 감탄고토가 본능인 생물이라 몇백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후손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거나 보통 인간이라면 보이기 힘든 충절을 보여 마음을 울리지 않는 이상,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다 하더라도 쉽사리 좋아하거나 존경까지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지도자라 하더라도 보수적인 시대에 태어나 이런저런 제약 속에서 정책을 펼치고 살아가야 했으니 재미있는 대목을 찾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재미있는 부분을 선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모든 페이지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김류의 아들과 손자가 행한 방탕과 패륜 등은 내 안에 잠자고있던 애국심이 울게 만들었으나 그들의 행실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가 되었다. 인조 역시 거시적으로는 이후 조선이라는 국가 앞에 막중한 분기점을 놓았으나 누구나 한 번쯤 리더를 꿈꾸는 현대 사회에서 반면교사가 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의 모든 부분을 사랑한 이유는 제목과 달리 이 책의 스포트라이트가 백성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세종대왕이건, 정조 치하건간에 울고 웃는 사람은 있었다. 그 극적인 희비는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고 힘 없는 자들이 겪는다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 민초들의 이러한 삶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소명되기는커녕 조명받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내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에서처럼 <인조 1636>은 권력 앞에 밟히고 누웠던 수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불러준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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