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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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문구에 나열된 화려한 수상 경력과 각종 찬사는 마치 간증과도 같아서, 덮어놓고 구매하긴 했다만 처음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거기다 (다소 편견 어린 시선이지만) 추리나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강렬한 강한 분홍빛이라니. 잔혹한 범죄를 떠올리게 만드는 빨강도 아니고, 고독하게 범인을 뒤쫓아야 하는 주인공의 냉소를 담은 검정도 아닌 진분홍색의 표지가 이제껏 읽었던 범죄 소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책을 살 때 되도록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지 않고 구매하는 편이라 다른 독자에 비해 책장을 펼치기 전, 책에 대해 아는 것이 비교적 적다. 그렇기에 살갗에 새겨진 것처럼 죽죽 늘어진 표지 제목에 기묘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딱히 좋아하는 디자인은 아니지만, 어째서 이런 제목과 디자인이 선정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하간, 포의 시선을 따라가기 이전부터 <퍼핏 쇼>만큼 내게 신경 쓰이는 작품은 없었다.

  잠깐 옆길로 새서, 이 작품이 내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퍼핏 쇼>2000년대를 풍미했던 플래시게임 제작사 사바켄(Sarbarkan)의 추리&미스테리 포인트 앤 클릭 게임, <아케인 미스테리>에 등장하는 환상열석 에피소드의 위태로움과 명쾌하지 않게 풀리는 사건, 그럼에도 흥미를 자아내는 사건 전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또한 같은 제작사의 <미스테리 박물관> 시리즈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개성이 뻔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경이로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처럼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개성에 끌려다니거나 하지 않고 적절한 존중 아래 훌륭한 시너지를 발휘하여 작품을 이끌어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좋아했던 만큼, 포의 심증에 크게 좌우되는 전개 방식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친근하고 반갑기도 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의도된 연출인지는 모르나 재미있게도 <퍼핏 쇼>의 사건 흐름은 이 작은 기묘함에서 시작된다. 과거 있었던 불미스러운 실수로 인하여 정직 처분 중인 전 경위 워싱턴 포. 고인돌이 원형으로 배치된 모양의 유적인 환상열석에서 연달아 불에 태우고 잔인하게 고문한 시체가 발견되고, 그중 세 번째 시체에서 칼로 깊게 새겨진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그의 이름과 함께 ‘5’가 적혀있었기에 그는 곧 다섯 번째 표적으로 예상되고, 자신에게 씌워진 의심과 범인의 위협 아래에서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은 직장동료들처럼 편협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독자들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이 작품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사건의 전환점을 알아채는 계기가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 작가 어디서 몰래 사람이라도 죽인 거 아니야? 왜 이렇게 현실성 있지?’라고 느꼈을 만큼 작가 개인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 실제로 포를 미행하는 스토커처럼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느 영국 시골의 안개와 적대적인 시선, 아웃사이더로서의 고독을 끊임없이 내 것처럼 맛볼 수 있었으며 현장에 복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던 어느 중년 경찰은 어느새 범죄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전개를 따라가는 내내 거슬렸던 등장인물이 모순되게도 말미쯤엔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책을 덮고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며 이것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기도 했다. 본디 훌륭한 작품이란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까지 사로잡는 것이라던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로잡힌 것을 보면 그 화려한 수상 이력이 납득간다. 앞서 묘한 위화감을 언급하며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비단 포에게만 국한되는 표현이 아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연 중 하나인 틸리 브래드쇼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판에 박힌 듯 평면적이었던(셜록 홈스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장르를 불문하고 천재라고 한다면 현실에서 보기 어려우면서 행동 하나하나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인물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간의 천재 등장인물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점점 배우고 진화하며, 종래에는 그를 진심으로 친구라 여기고 데이터가 아닌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를 구하러 오토바이를 모는 발전을 보인다. 그렇기에 위기를 넘기고 병실에서 잠든 그들을 보게 될 때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외골수 짓만 하는 중년의 상급자와 온실 속 화초로 자라 사회성이 떨어지지만 순수한 천재 여성의 콤비는 언젠가는 세상에 나와줬으면 싶었던 조합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매력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자연스럽다는 점에 있다. 엽서의 숨겨져 있던 뒷면이 드러나며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계기, 범행이 전개된 방식과 그 이유는 모두 현실에서 있을법한 일들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포의 반응과 범인의 반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그들의 대화는 현실과 다름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씁쓸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작가가 현실의 앞면과 뒷면을 면밀하게 포착하고 이야기로 가공할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직시해 칵테일처럼 잘 조절했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작품의 서술 방식이나 전개가 이전에 전혀 없던 새로운 방식은 아님에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이 마무리되는 방식 또한 환상적이다. 너무 감상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독자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적절한 여지를 남겼고, 마지막으로 포와 브래드쇼의 행보를 미치도록 궁금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포는 범인의 연극에 등장하는 주연에 불과했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그는 스스로 우리 앞으로 걸어나와 커튼콜에 응하는 주연 배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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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 못하고 근무 중 휴식 시간마다 몰래 창고에 숨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책이다.


그는 브래드쇼를 생각했다. 마르고 근시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어리둥절해하던 모습을. 브래드쇼가 섑 웰스 라운지에 앉아 있는데 그 술 취한 머저리들이 추근대던 때를. 그때 브래드쇼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포가 그들을 쫓아냈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그렇게 군 까닭은 브래드쇼가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서투른 외면 안쪽에 뭔가 특별한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 드러낸 일이었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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