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인사이트 2023 - 새로운 투자 시그널을 포착하는 시장대전망 - 에너지, 금리, 미중 시장, ESG, K-방산까지
박영훈 외 지음 / 길벗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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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에 모두가 터무니없는 예상이다, 라고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미국 시장의 장세 조짐과 영원할 줄 알았던 중국 시장이 맞닥뜨린 본질적 위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될듯한 에너지 전쟁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두꺼운 안개처럼 앞을 가리고 있습니다. 어느때보다 정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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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 신들의 사생활 - 판도라의 항아리를 열다! 그리스 로마 신화 : 신들의 사생활 1
<그리스 로마 신화 - 신들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단꿈아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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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상식처럼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신과 요정, 인간 사이에 오갔던 애증과 희로애락이라는 지극히 인간다운 여덟 가지의 이야기를 서양 고전, 역사학자, 아트 디렉터의 눈으로 기술하여 자칫 왜곡될 수 있는 타국의 신화를 다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균형잡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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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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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어느 무더운 여름, 교회 지붕에 올라가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지붕을 청소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이는 무뚝뚝한 인부 랜드와 그보다는 좀 더 어려 보이는 게리의 모습. 중간중간 묘사되는 배경은 독자에게 그들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한편 게리는 일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떠드느라 바쁘다. 급기야는 상상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머지, 위태로운 상태로 비를 잡으려다 지붕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간신히 랜드의 손을 잡고 버티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급박함 속에서 랜드는 게리에게 어디를 붙잡아야 하는지 알려주며 이와 동시에 자신은 빠르게 달려가 게리가 밟을 수 있도록 지지대를 설치한다. 이윽고 랜드의 지시에 따라 비계를 밟고 내려오게 된 게리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예리한 사람이라면 위기 상황에서 게리를 구하는 랜드의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랜드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초반의 일화를 읽으며 앞으로 게리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리라 생각했었다. 비록 지붕에서 이야기하다 떨어진 것 말고는 활약이란 없었지만, 그 나이대 청년이라면 가졌을 법한 활기와 상상력, 자신감이나 쾌활함 등이 모험의 주인공이라면 으레 가질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랜드는 과묵했다. 게리의 상상 속에서 랜드의 역할이란 자신의 성공을 더욱 빛나 보이게 해 줄 단역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게리 뿐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조용하고 그 내면을 알기 어려우면서 충동적이기도 한,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랜드의 모습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거리를 배회하는 홀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길들지 않았으면서 이미 지극히 타락해버린 내 눈에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열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되는 동안 초점은 번번이 캐벗이나 브레이, 배닝처럼 다양한 인물들에게 할애된다. 한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랜드의 위치를, 그것도 랜드의 내면과 행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설터의 서술방식은 서사를 진행하는 데 있어 상당히 개성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랜드는 게리가 멕시코 여자라고 묘사했던 루이즈에게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루이즈의 아들 레인과 가볍게 산을 타러 가기도 하며 퍽 다정해 보이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인과 등반하러 간 곳에서 함께 산을 탔던 동료 캐벗과 재회하며 랜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울고 있는 루이즈를 두고.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이 주는 안락함을 떠나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를 품은 샤모니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산과 독대하지 않는다. 산을 혼자 오르는 인물이지만 모순되게도 산 밑에서는 다양한 인물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쌀쌀맞은 프랑스인, 어리숙한 일본인, 은행 창구의 어느 직원, 비강, 카트린과 콜레트, 시몬과 수전. 그는 고독을 선호하는 인물이면서 그 고독을 감내하기보다 충동에 따라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해결한다.

  산을 대할 때에도 다른 산악인이라면 다소 무모하다고 이를 방식을 택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용할, 타인이 박아놓은 피톤을 뽑아버리는 행위가 그런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본능적 행위가 도리어 사회가 그를 찾도록 만들게 하기도 했다. 드뤼 서벽을 정복하던 과정에서 캐벗이 심각한 상처를 입기도 하고 조난자를 구하기 위해 모두가 말리는 루트로 오르기도 하며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불똥같은 흐름은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가 자기 아들조차 보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의 남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끔 한다. 종래의 그는 지나온 모든 여정을 한때의 기억으로 묻어두고 사회와 등반에서 만족하지 못한 채 끝내버린다. 어찌보면 뜨거운 열기를 기대했을 독자에게는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품 밖에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던 작품이 진행되는 모든 순간 동안 그는 방황한다. 마치 이보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보증 수표를 가진 사람처럼 행동한다. 산은 랜드에게 한번도 반기는 얼굴을 한 적이 없음에도 그는 이를 수용하고 끈기 있게 그곳을 찾는다. 그의 등반은 신을 찾는 신자처럼 산 앞에 자신을 데리다 놓고 한계를 시험해보는 방식이다.

  작가인 제임스 설터는 실존 인물 게리 헤밍(Gary Hemming)을 투영한 각본을 쓰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으로서는 너무 과묵하다라는 평을 받고 각본은 반환당한다. 그대로 영영 빛을 보지 못할 위기에 처했던 작품은 어느 편집장의 설득 끝에 소설로 재탄생한다. 처음에는 이 속을 알기 어려운 인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던 탓에 서술을 좇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순간이 있었다. 샤모니, 드뤼, 아이거, 그랑드조라스, 워커를 오가는 산악인들의 정복욕과 출세욕 그리고 생명 앞에서의 순수한 의지는 태양 빛을 반사하는 설산의 풍경처럼 빛난다. 동시에 그들은 그 모든 것에 중독된다. 캐벗은 다리를, 브레이는 목숨을 잃고서 산과 이별하고 사회의 품에 돌아가게 되었다. 랜드는 안전하게 산을 내려올 수 있었지만 워커 산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다 포기하게 되며 이전까지 자신 안에 있었던 패기와 의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을 오르내리며 명성을 쌓았지만 성공으로 귀결시키지는 않았던 그이기에 산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를 캐벗에게서 찾으려 시도하다 실패한 뒤로 그는 환멸 속에 살아간다.

  이 책에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 심지어는 등산 용어가 등장한다. 독서는 좋아하지만, 산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낯선 곳에 갑자기 떨어졌다고 느낄 만큼 소외감이 들 수도 있다. <포 페더스(The Four Feathers)>처럼 글이 쓰였을 시대를 알려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친절한 번역은 틈틈이 산악 용어나 지명을 알려주며 자연스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이음매가 되어주지만 이로서는 역부족이다. 독자는 필연적으로 당혹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우박처럼 쏟아지는 이 불친절한 전개가 랜드가 수많은 사람을 거치며 그들 사이에서 느끼는 고독 혹은 이질감이라고 생각했다. 적지 않은 여성들과 깊고 얕은 관계를 거치며 때로는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인간인 양 살아왔던 랜드는 산을 통해 자신을 찾고 잃는다. 책 표지만을 보았을 때, 나는 <고독한 얼굴>의 랜드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떠올리게 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책장을 덮으며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고독한 얼굴이라는 작명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산악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이해받기 어려운 내면을 품은 자의 긴 여정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 혹은 대중이 기대하는 산악인의 장엄함, 미지를 향한 호기심은 암벽을 오르는 순간엔 버려야 할 잡념에 불과하다. 장비와 식량, 침낭과 동료와 함께 산에 오를 때에는 가지고 올라야 할 것이 많아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나 산을 오르며 어느새 가벼워진 몸을 발견할 수 있다. 랜드가 거친 삶의 여정도 산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살아남은 산악인들이 변하듯, 흔한 기성세대 중 하나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려가며 산을 올랐다. 동시에 버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를 지독하게 따라온 고독감은 인생의 종착지에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고독한 얼굴(Solo Faces)>은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등산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날 것의 산과 등반, 랜드라는 사람에 대하여 비추고 있기에 쉽사리 읽히게 되는 여타 작품과는 달리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려움과 함께 단순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산악인으로서의 고뇌와 방황은 우리에게 낯선 감각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일상에서는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세상의 이면 중 하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터는 독자가 너무 쉽게 그들을 공감한다고 얘기하지 않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만큼 랜드의 내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듯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 차갑지만 근사해 보이는 알프스의 산들을 대면하게 된다. 어쩌면 일반인들에게 산이 그런 존재로 인식되는 것처럼 그에게는 세상이 그런 곳일지 모른다. 실존 인물인 게리 헤밍은 세상으로 돌아온 뒤 36살의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자살 직전의 그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빨리 미국을 떠나야만 돼.

이 나라에서는 언제나 죽음이 나를 덮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삶을 정복하러 떠나야만 한다. 이곳에도 분명히 조난과 낙석, 악천후는 존재할 것이다. 그 모든 위험을 극복했을 때 찾아올 사무치는 고독감을,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고 맞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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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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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때에 따라 듣는 이에게 살아갈 힘을, 또 다른 때에는 죽음을 실행할 힘을 쥐어준다. 하지만 이런 힘을 가진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다. 이미 죽겠다는 의지를 굳힌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단어도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 혹은 그러한 죽음으로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문장이나 따스한 포옹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불변의 진리 뿐이다. 그 말대로 이미 죽음을 실행하고 성공한 사람은 죽음이 어땠는지, 인간에게 어떠한 존재일지 찰나의 순간을 느낄 수만 있을 뿐, 재현해낼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채 생존자의 진술과 추론을 토대로 막연히 상상해 볼 수 밖에 없다.

  더 깊게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우리라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인간이라는 지능적 동물이 이룩해낸 기술 수준은 가히 눈부실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너무도 오만한 경향이 있다. 아니, 어쩌면 가장 공감 능력이 높은 인간이라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종(種)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그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를 에워싼 공동체에 잘 녹아들기 위해 그 가시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눈치를 보아야 할, 어쩌면 본성을 숨기기 위하여 절제해야 할 상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에는 달라진다. 소위 말하는 '뒷담'을 하고 그닥 사회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숨겼던 신체 언어(버릇)를 드러낸다. 이러한 행태는 죽은 자를 상대로도 동일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선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자의 의도와 인격이 훼손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죽음이 자살일 경우에는 무심코 내뱉는 가시가 더욱 원색적으로 변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날까지도 실제로 대놓고 자살을 부적절한 존재, 주변 사람들에게 끼치는 민폐라 칭하는 국가는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설령 자살을 사회암적인 존재라 표현하지 않더라도, 자살이라는 단어조차 쉽게 쓸 수 없는 형편이다. 누군가는 이런 자연스러운듯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장 아메리처럼. 그와 나는 성별, 인종이나 성장 환경, 심지어는 살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각각의 방식으로 '자유 죽음', 사회에서는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불리우는 개념에 대하여 고찰해왔다. 그런데 이 공허의 영역(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고 죽음은 부존재, 없음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을 연구하고자 한 것이 장 아메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장 아메리의 죽음에 대한 주장이 크게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과 장 아메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큰 간극 때문이다.

  앞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과학 기술의 수준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인간이 오만하다고도 말했다. 무엇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토록 속단하기 쉬운 동물로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류가 지닌 보편적 기술 수준이나 추론 능력이 결코 절대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님에도 우리는 이것이 정답인양 구는 고질적 버릇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단정은 학자들, 특히 과학자, 의사, 심리학자들이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잘 나타난다. 굳이 <자유죽음> 내에서 저자가 언급한 오만불손한 일화들을 꺼내지 않아도 눈 앞에서 경악할만한 거만함을 목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학자들은(당연히 한 번이 아니었다) 공적 장소의 대표격인 공공 인재 육성 기관의 연단에 서 있었음에도 그 순간, 자기가 진행하는 강의에 흥미라는 양념을 치기 위하여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예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시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자유 죽음은 극단적인 자들에 의하여 이기적 도피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와 저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건,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고 있건 자유 죽음과 이를 선택한 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자라는 존재의 일부는 때때로 그들 자신을 그들에게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재단할 명분을 쥐어준 학문 자체와 동일시하여 지극히 오만하면서 그 분야 외적인 고찰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는 편협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은 그의 행보가 마땅히 존경받을만한 길을 거쳐왔기 때문이기도 하나, <자유죽음>에서 그가 펼친 자유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그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탄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처럼 그는 정말 자유 죽음은 물론이고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아주 진중하고 깊되 현학적이거나 비관적으로 흐르지는 않는 적절한 거리에서 자유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중세, 근대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자유 죽음에 대하여 기존 사회가 가진 인식의 제한을 돌파하는 새 정의를 찾기 위해 역사, 철학, 문학 등 인간이 확립해놓은 학문과 규율, 삶과 죽음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존중받아야 할 죽음과 죽은 자들을 위하여 펜을 들고 투쟁했다. 그러나 결코 미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정함 때문에라도 그를 알고 그의 글을 읽는 자들은 죽음과 삶, 이를 동시에 생각한 그에 대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나는 그와 비교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추론에 어떠한 진척도 갖지 못하고 어중간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자유죽음>을 읽고 난 후와 이전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인간인 이상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존재와 존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있는 존재인 나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만드는 에셰크로부터 도망치고자 하고, 그 도피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물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고 내가 결국 죽음을 실행하게 된다면 슬퍼하거나 비난하고 심지어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사용하여 잘 알려진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라는 글귀에 담긴 진리가 아메리가 <자유죽음> 내내 주장한 '자유 의지로써 존중받는 죽음'을 생각하는 삶과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그가 그 생의 마지막을 자유 죽음으로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자유 죽음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한다고 치부하는 것은 그와 자유 죽음을 택한 모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의 의견은 아니나, 나는 죽음에 대하여 쉽게 내뱉고 쉽게 생각하는 자의 삶이 타인의 삶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유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개념과 <자유죽음>은 모두 어려운 것이고, 저자는 이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에 가까워지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비관적인 삶, 얽매인 삶을 살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그의 의도라고 믿는다.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쩍 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사람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요란 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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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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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근원을 이루는 것을 학문으로 풀어 설명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리면, 그것은 어떤 분야가 되어야겠는가?

비록 내가 다른 수포자들이 그렇듯, 학생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없음을 체감하고 이러한 추상적 세계와 오래전에 작별한 범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허준이와 같은 쟁쟁한 학자들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기심과 선망의 눈길을 걷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그런 모순적 태도에 대한 시작은 학원에서부터였다. 초등학생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어린 나이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이 조그마한 두뇌를 한참 동안 돌려 겨우 네모난 상자의 부피를 계산하고 있을 때,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작 한두 개의 선만이 주어진 순백의 세계에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는 물론이고 선이 교차하는 각도, 그 속에서 오가는 숫자들의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그런 문제들로는 그 머릿속에 든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지 알기 어려웠다. 저것이 천재의 경지란 말인가? 나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내려다보는 경치를 알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재능과 노력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듯한 상황은 비관론이 세상을 뒤덮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과학이라는 땅은 어찌나 넓고 험준한지 현실을 파악하는 것에도 격차가 존재하는 우리에게 과학을 교양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거의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현실의 이러한 틈을 메꾸는 것은 허구, 즉 문학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을 통해 우리가 대학자라고 부르는 탐구자들이 세기의 발견을 해냈을 때 그들에게 들었던 오감과 생각, 바람의 세기를 재현해냄으로써 잠시나마 그들이 되어 볼 수는 있다.

   크게 다섯 번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는 이 다정한 세상의 안내서는 쉽다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들이 매력을 느꼈던 미지의 체계가 현실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재미있게 보여준다. 과학과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아왔던 과거의 나였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첫 이야기는 전채요리처럼 그들이 사랑한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우었다. 괴링의 손톱에서 시작해 프러시안 블루’, ‘울트라 마린’, ‘셸레 그린이라는 색상의 진화사를 거쳐 결국에는 유대인 수용소의 대량 살상에 사용되었던 치클론 B’라는 독가스로 돌아오는 자연스러운 흐름은 마치 신기한 스쿨버스를 타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우리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그러면서 우리 흥미가 식기 전에 다시 손을 잡아 그로텐디크와 신이치, 하이젠베르크의 충격을 함께 맛보도록 권한다. 그 충격은 막 코드를 뽑은 콘센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순간처럼 오묘하고 부지불식간이었다. 그들이 접근했던 수학적 개념은 발견 당시의 날 것이 아니라 이해와 몰입을 위하여 다채로운 언어로 조리되어 우리 앞에 올랐지만 강렬한 쾌감은 극대화되어 아지랑이처럼 글자 위에서 피어올랐다. 동시에 발견자 스스로조차 결코 확신할 수 없는 학문의 땅에서 브로이가 느꼈을 고독과 불안함,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학자들의 혼란이 불러온 아우성과 혼돈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이해조차 쉽지 않았기에 두려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확실히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작품을 읽는 순간만큼은 당대의 위대한 학자들이 느꼈을 학문적 성취와 쾌감, 현실과 추론의 경계를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처럼 벵하민 라바투트는 우리 눈에 나타난 글자만으로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나머지 신기루라고 생각되는 수학이 어떻게 그토록 간단히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가상이라는 이름을 빌려 현실일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언젠가 그 공간에 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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