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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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근원을 이루는 것을 학문으로 풀어 설명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리면, 그것은 어떤 분야가 되어야겠는가?

비록 내가 다른 수포자들이 그렇듯, 학생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없음을 체감하고 이러한 추상적 세계와 오래전에 작별한 범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허준이와 같은 쟁쟁한 학자들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기심과 선망의 눈길을 걷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그런 모순적 태도에 대한 시작은 학원에서부터였다. 초등학생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어린 나이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이 조그마한 두뇌를 한참 동안 돌려 겨우 네모난 상자의 부피를 계산하고 있을 때,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작 한두 개의 선만이 주어진 순백의 세계에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는 물론이고 선이 교차하는 각도, 그 속에서 오가는 숫자들의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우 그런 문제들로는 그 머릿속에 든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지 알기 어려웠다. 저것이 천재의 경지란 말인가? 나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내려다보는 경치를 알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재능과 노력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듯한 상황은 비관론이 세상을 뒤덮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과학이라는 땅은 어찌나 넓고 험준한지 현실을 파악하는 것에도 격차가 존재하는 우리에게 과학을 교양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거의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현실의 이러한 틈을 메꾸는 것은 허구, 즉 문학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을 통해 우리가 대학자라고 부르는 탐구자들이 세기의 발견을 해냈을 때 그들에게 들었던 오감과 생각, 바람의 세기를 재현해냄으로써 잠시나마 그들이 되어 볼 수는 있다.

   크게 다섯 번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는 이 다정한 세상의 안내서는 쉽다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들이 매력을 느꼈던 미지의 체계가 현실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재미있게 보여준다. 과학과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아왔던 과거의 나였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첫 이야기는 전채요리처럼 그들이 사랑한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우었다. 괴링의 손톱에서 시작해 프러시안 블루’, ‘울트라 마린’, ‘셸레 그린이라는 색상의 진화사를 거쳐 결국에는 유대인 수용소의 대량 살상에 사용되었던 치클론 B’라는 독가스로 돌아오는 자연스러운 흐름은 마치 신기한 스쿨버스를 타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우리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그러면서 우리 흥미가 식기 전에 다시 손을 잡아 그로텐디크와 신이치, 하이젠베르크의 충격을 함께 맛보도록 권한다. 그 충격은 막 코드를 뽑은 콘센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던 순간처럼 오묘하고 부지불식간이었다. 그들이 접근했던 수학적 개념은 발견 당시의 날 것이 아니라 이해와 몰입을 위하여 다채로운 언어로 조리되어 우리 앞에 올랐지만 강렬한 쾌감은 극대화되어 아지랑이처럼 글자 위에서 피어올랐다. 동시에 발견자 스스로조차 결코 확신할 수 없는 학문의 땅에서 브로이가 느꼈을 고독과 불안함,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학자들의 혼란이 불러온 아우성과 혼돈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이해조차 쉽지 않았기에 두려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확실히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작품을 읽는 순간만큼은 당대의 위대한 학자들이 느꼈을 학문적 성취와 쾌감, 현실과 추론의 경계를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처럼 벵하민 라바투트는 우리 눈에 나타난 글자만으로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나머지 신기루라고 생각되는 수학이 어떻게 그토록 간단히 우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가상이라는 이름을 빌려 현실일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언젠가 그 공간에 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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