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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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때에 따라 듣는 이에게 살아갈 힘을, 또 다른 때에는 죽음을 실행할 힘을 쥐어준다. 하지만 이런 힘을 가진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다. 이미 죽겠다는 의지를 굳힌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단어도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 혹은 그러한 죽음으로의 실천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문장이나 따스한 포옹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불변의 진리 뿐이다. 그 말대로 이미 죽음을 실행하고 성공한 사람은 죽음이 어땠는지, 인간에게 어떠한 존재일지 찰나의 순간을 느낄 수만 있을 뿐, 재현해낼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채 생존자의 진술과 추론을 토대로 막연히 상상해 볼 수 밖에 없다.

  더 깊게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우리라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인간이라는 지능적 동물이 이룩해낸 기술 수준은 가히 눈부실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너무도 오만한 경향이 있다. 아니, 어쩌면 가장 공감 능력이 높은 인간이라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종(種)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그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를 에워싼 공동체에 잘 녹아들기 위해 그 가시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눈치를 보아야 할, 어쩌면 본성을 숨기기 위하여 절제해야 할 상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에는 달라진다. 소위 말하는 '뒷담'을 하고 그닥 사회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숨겼던 신체 언어(버릇)를 드러낸다. 이러한 행태는 죽은 자를 상대로도 동일하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라는 선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자의 의도와 인격이 훼손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죽음이 자살일 경우에는 무심코 내뱉는 가시가 더욱 원색적으로 변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날까지도 실제로 대놓고 자살을 부적절한 존재, 주변 사람들에게 끼치는 민폐라 칭하는 국가는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설령 자살을 사회암적인 존재라 표현하지 않더라도, 자살이라는 단어조차 쉽게 쓸 수 없는 형편이다. 누군가는 이런 자연스러운듯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장 아메리처럼. 그와 나는 성별, 인종이나 성장 환경, 심지어는 살았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나는 각각의 방식으로 '자유 죽음', 사회에서는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불리우는 개념에 대하여 고찰해왔다. 그런데 이 공허의 영역(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고 죽음은 부존재, 없음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을 연구하고자 한 것이 장 아메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장 아메리의 죽음에 대한 주장이 크게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과 장 아메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큰 간극 때문이다.

  앞서 인간이 이루어 놓은 과학 기술의 수준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인간이 오만하다고도 말했다. 무엇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토록 속단하기 쉬운 동물로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류가 지닌 보편적 기술 수준이나 추론 능력이 결코 절대적으로 높은 수준이 아님에도 우리는 이것이 정답인양 구는 고질적 버릇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단정은 학자들, 특히 과학자, 의사, 심리학자들이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잘 나타난다. 굳이 <자유죽음> 내에서 저자가 언급한 오만불손한 일화들을 꺼내지 않아도 눈 앞에서 경악할만한 거만함을 목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학자들은(당연히 한 번이 아니었다) 공적 장소의 대표격인 공공 인재 육성 기관의 연단에 서 있었음에도 그 순간, 자기가 진행하는 강의에 흥미라는 양념을 치기 위하여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예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시야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자유 죽음은 극단적인 자들에 의하여 이기적 도피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와 저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건,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고 있건 자유 죽음과 이를 선택한 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자라는 존재의 일부는 때때로 그들 자신을 그들에게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재단할 명분을 쥐어준 학문 자체와 동일시하여 지극히 오만하면서 그 분야 외적인 고찰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는 편협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것은 그의 행보가 마땅히 존경받을만한 길을 거쳐왔기 때문이기도 하나, <자유죽음>에서 그가 펼친 자유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그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탄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처럼 그는 정말 자유 죽음은 물론이고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아주 진중하고 깊되 현학적이거나 비관적으로 흐르지는 않는 적절한 거리에서 자유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중세, 근대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자유 죽음에 대하여 기존 사회가 가진 인식의 제한을 돌파하는 새 정의를 찾기 위해 역사, 철학, 문학 등 인간이 확립해놓은 학문과 규율, 삶과 죽음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존중받아야 할 죽음과 죽은 자들을 위하여 펜을 들고 투쟁했다. 그러나 결코 미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정함 때문에라도 그를 알고 그의 글을 읽는 자들은 죽음과 삶, 이를 동시에 생각한 그에 대하여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나는 그와 비교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추론에 어떠한 진척도 갖지 못하고 어중간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자유죽음>을 읽고 난 후와 이전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인간인 이상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존재와 존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있는 존재인 나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만드는 에셰크로부터 도망치고자 하고, 그 도피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물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고 내가 결국 죽음을 실행하게 된다면 슬퍼하거나 비난하고 심지어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사용하여 잘 알려진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라는 글귀에 담긴 진리가 아메리가 <자유죽음> 내내 주장한 '자유 의지로써 존중받는 죽음'을 생각하는 삶과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그가 그 생의 마지막을 자유 죽음으로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자유 죽음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한다고 치부하는 것은 그와 자유 죽음을 택한 모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의 의견은 아니나, 나는 죽음에 대하여 쉽게 내뱉고 쉽게 생각하는 자의 삶이 타인의 삶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유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개념과 <자유죽음>은 모두 어려운 것이고, 저자는 이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에 가까워지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를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비관적인 삶, 얽매인 삶을 살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그의 의도라고 믿는다.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쩍 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사람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요란 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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