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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ㅣ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2
전우용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평점 :
개인 SNS에서 촌철살인의 진수를 보여주며 혹자는 전문 타골사라고까지 말하는 작가가 역사학자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그가 특히 더 분개하는 소위 토착왜구세력에 대해 촌철살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를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을 알기쉬운 문체로 그리고 이야기하듯이 잘 설명해준다. 근현대사에 그의 기존 2권의 책보다 좀 더 쉽게 읽히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지 아니면 그간 많은 SNS활동에 따른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추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우리 생활에 좀 더 가까운 근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에 충분한 책이다.
근대의 모습이 투영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 되어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일제 36년이라는 시간이 우리의 삶의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제도가 대부분 일제 식민지시대에 정립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 담겼다기 보다는 일본인이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은 참 안타까운 것같다. 그러기에 아직 우리 주변에는 한국인인 모습을 하고 있는 토착왜구 세력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한국 남성들이 너도나도 포경수술을 받게 된 데에는 의학적 효용뿐아니라 전쟁을 겪으면서 ‘신분 관념이완전히 붕괴하고 그 대신 균질화의 욕구가 정면에 떠오른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남성들이세계 제일의 포경수술 비율을 자랑 하게 된 배후에는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심리, 일단 ‘정상‘이나 ‘표준‘으로 인정된 것이라면그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도 있었다. 이런 문화에서는 특수 특별 · 특권이 더 백안시되기 마련이지만, 한편으로 그 특수 특별 특권에 대한 욕망도 만만치 않다. ‘특권층‘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특권층들의 처신이 언제나 아슬아슬한것도, 이런 양면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p.35
그런데 ‘사랑‘은 순우리말이 아니다. 한자어 상량이 변한 말이다. 이와 가장 가까운 순우리말 단어는 헤아리다‘로서 계산하다. 계측하다와 비슷하다. 사고 유형으로는 수학적 사고에 해당한다. 사물과 사상, 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려면 신중하고 세심하며 정밀하고집요해야 한다. p.67
현모양처론은 중세 유교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장아되어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일본천황제 국민국가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성이 나라에만 충성한수 있도록 뒤에서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미래의 신민으로 기르는 일이었다. 현모양처라는 용어는 성인 남성을 가정에서완전히 이탈시켜 천황에 직속된 신민의 일원이라는 자격만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가정에 생긴 ‘권위의 공백을 제국 신민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자각한 여성의 자발적 헌신으로 메우려는 의도에서만들어진 것이다. p.77
1913년 조선총독부는 객주취체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이에 따르면 객줏집을 비로솬 숙박업소를 경영하는 자들은 자기 집에 숙박한 손님의 인적사항과 전날 묵은 곳, 행선지 등을 기록해 두었다가 손님이 떠나면 한 시간 안에 경창주재소에 신고해야 했다. 가처가 일정치 않은 독립운동 혐의자들을 감시하려는 조치였는데, 이로써 여행객의 위치 정보는 가족른 몰라도 경찰은 아는 특수정보가 되었다. p.243
도시는 기본적으로 권력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공간이다.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다. 그래서 도시의 생명은 대체로 권력의 생명보다 길다. 이른바 역사도시는 거시적으로든 미시적으로든 여러 차례의 권력 교체를 경험한 공간이다. 이런 도시들에서는 새 도로를 내고 새 건물을 짓는 것뿐 아니라 낡은 건물을 헐거나 남겨 두는 것까지 정치적 고려가 개입한다. p.301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일본인은 남성적이고 한국인은 여성적˝이라는 이미지를 조작해 식민 지배를 남성의 여성 지배와 등치하려했다. 관제엽서나 포스터는 기생 등의 여성이나 입에 곰방대를 문 노인으로 한국을 형상화했고, 학교에서는 방정한 품행만 앞세우고 기개와 지조는 뒤로 밀어냈다. 더불어 남성성을 대표하는 정신이자 태도였던 기재와 지조는 성가신 개념이 되었다. 부정한 권위에 맞서고 부당한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비국민적 악덕으로 재배치되었다. p.362
일본인들이 양력과 음력을 각각 문명과 야만의 표상으로 설정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오히려 양력에 대한 저항이 더필요했다. 조선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는 음력을 지키는 것이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책동에 대한 저항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음력은 계속 농촌의 생활리듬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도시에자는 조선인들의 생활리듬에도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조선인들은명절, 생일, 제사, 이사 등 특별한 날은 모두 음력을 따랐다. 양력 1월1일의 신정은 왜설이라 하여 외면했을 뿐더러, 신정을 쇠는 조선인들은 암암리에 배신자나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p.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