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촉촉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이 시집은

백세시대에 참으로 심란한 타이틀을 제목을 삼았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라고 불렀다니..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는

시인의 아버지와의 이별이야기


아버지도 뱀이 되고

이별도 뱀이 되고

유언도 뱀이 되고

사랑도 뱀이 되고

미움도 뱀이 되고

모두가 뱀이 되어 버린..

그런 이야기


 


기운도 없으면서

축축하기나 하고

하품이나 뿜뿜해대며

느리고 느리게,

길고 길게..

아름답게  천천히..

나를 지나 갈

그래서

눈이라도 감아야 할

그런 모진 뱀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