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블루 아이즈 - 타다 유미 베스트 2
타다 유미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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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해적판으로 보았던 단편집 <접물>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 다시 보는 타다 유미의 그림은 아직도 감탄을 자아낸다. 캐릭터, 컷분할과 구도, 흐르는 듯한 펜선까지 작가의 그림을 보면 마키 쿠수모토(탐미-비주류 일본만화의 대명사인)의 그림마저도 다소 조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더구나 이 책에는 데뷔작부터 시작하여 초기(80년대)와 최근의 작품이 골고루 섞여 있으며 작품을 엄선한 에디터의 작품 해설, 그리고 작가와의 인터뷰까지 실려있어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내용에 있어서는 취향에 따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는 일관되게 미국을 배경으로 밑바닥 인생들을 다루고 있는데 다소 루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관용적이고 방관적인 태도이며 사회적 의식 같은 것은 희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터뷰를 읽고 작가 자신이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고 나면, 그녀의 작품이 패셔너블한 그림에 루저 의식을 더한 흔해빠진 겉멋은 결코 아님을 알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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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브라운 신부 전집 2
G. K. 체스터튼 지음, 봉명화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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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요란한 찬사들이 아니었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정말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섬세한 묘사력, 인간성의 애매모호함에 대한 통찰 등은 책의 문학성에 기여했고. 평들을 보니까 '너무 쉽게 맞추어서 썰렁하다'라든지 '너무 짜여졌다는 티가 난다'는 의견들이 많은데 내 생각에 이 작가가 쓰려고 의도했던 것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추리소설은 아닌 듯하다.

브라운 신부도 고도의 두뇌 플레이를 제시하는 안락의자 탐정이 아니라, 어떤 에피소드를 제시하고 풀어내면서 인간성의 한 단면을 제시하려는 철학자를 보는 느낌이랄까. '사물을 정의하는 말과 그 안에 함축적으로 내포된 의미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네. 무기라고 하면 뭘 지칭하지? 흔해빠진 살림도구로 얻어맞고 죽는 사람도 있는데 말야. 반면, 고대 브리튼족에게 연발 권총을 들이댄다 한들 그것이 무기인줄 알 리가 없겠지.'
이런 대사들은 거의 현대 철학서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다만, 구석구석에서 드러나는 보수적 성향과 특히 동양에 대한 선입견은 현대적 political correctness에 익숙해진 독자로선 좀 불편한 느낌이다. 그러한 지성인도 당시의 보수적, 제국주의적 영국 사회라는 맥락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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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아나키즘
엠마 골드만 지음, 김시완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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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얘기하는 아나키즘이 현재에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 앞의 소개글에서도 나왔듯이, 현재 아나키즘의 주류는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운 조어다.)과 ‘에코 아나키즘’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아나키즘에 동조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나키즘의 초창기 모습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소위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이라는 것은 개인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브나로드 운동가들도 엘리트주의자인지도 모르나, 최소한 사회를 향해 열려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나키즘의 초창기, 각 개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느껴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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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 나의 인생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유시주 옮김 / 눌와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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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맥클린톡에 대한 책 <생명의 느낌>을 읽고, 생물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로서는 감동했지만 여성 독자로서는 다소 기대에 못미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양쪽 모두를 충족시켜 주었다. 마거릿 로우먼은 식물학자이며 열대우림의 나무 꼭대기(!)의 생태를 전공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이 책의 제목처럼 이십 년이 넘게 젊은 시절에는 로프로, 임신중에는 크레인으로, 그밖에 온갖 수단을 이용해 나무를 오르내리며 살아왔다.

그녀는 연구중 호주의 시골에서 결혼하여 두 아이를 가졌고, 주부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호주 시골의 문화와 자신이 원하던 연구자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교수직 제의를 받아들여 별거하였으며,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와서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성적'인 전문직 여성(그것도 '과학자'인 것이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무색하게 하는 멋진 책이고, 멋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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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울력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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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갑자기 소설에 대한 구미가 돌아와서, 도서관을 헤집다가 제목이 눈에 들어와-저 시대에 뒤진 일본풍의 '생도'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뽑아보니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이었군요. 그의 데뷔작이며, 국내에 두번째로 번역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읽으면서 참 글을 잘 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탄탄하게 잘 쓰여진 산문을 읽는 즐거움.

여성들의 글을 읽은 후에 읽는 남성들의 글은 참으로 직설적이고 참으로 솔직하였지요. 그것은 그러한 마음의 자유와 인격의 자유분방함과 자신감을 나타내주지요. 우리는 결코 방해받은 적도 반대를 받아본 적도 없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은 아무 데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태어나서부터 누려온 이 잘 길러지고 잘 교육받은 자유로운 마음의 현존 속에서 육체적 안녕을 감지하게 됩니다.
-버지니어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하지만, 역시 공감이 가지 않더군요. 한두 부분을 빼놓고는. 섹스를 '음란''방탕''혐오스러움' 등등의 단어로 서술하는 문학에는, 아주 진절머리가 났으니까요. 이 소설에서의 여성상은, 19세기에 남성들이 쓴 소위 명작소설들에서의 부정적 상을 그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생물학적인 여성 대신 '여성적인' 음란한 몸을 가졌으며 비굴하고 도덕관념이 없는 소년이 여성을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성장소설인 데미안에서 뉘앙스만 풍겼던 동성애가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군요. 단 낭만적인 분위기는 눈꼽만큼도 없고, 권력관계와 욕정만이 문제입니다.)

읽어가다 보면 19세기적 언어와 관념 속에, 20세기적 인식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 스쳐가곤 합니다. '모호한 명징함'이랄까요. 그것이 소설 전체에 생기와 불협화음, 묘한 혼란의 매력을 줍니다. 그러나 여성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가장 19세기적인 소설이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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