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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더 아픈 쪽으로, 더 가까운 쪽으로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왜 죽으면 안되냐’고 자신의 언니에게 물었을 때, 나는 무언가로 머리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래, 살아 있다면 죽고 싶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영혜의 언니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살아야지, 죽긴 왜 죽어! 『희랍어 시간』의 인물은 마치 영혜의 언니가 진화하고 발전한 것 같다. 더 단단하고 강력해진 인물만큼 슬픔과 고독도 강해졌다. 소설은 서로 다른 상처를 지닌 두 인물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남자는 유전적인 요인으로 서서히 눈이 멀고 있고, 한 여자는 어떤 심리적인 이유로 말을 잃은 채 살아간다. 이런 상황을 빼면 둘의 삶은 크게 긴박하거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첫눈에 반한다든가 대번에 서로가 소울메이트임을 알아봤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여자가 희랍어로 시를 쓴 이후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알던 말과 언어는 침묵에 갇히거나 완전히 죽은 것이 된다. 비어 있는 언어의 자리는 사라져가는 약한 시각의 묘사와 말을 제외한 감각들로 채워진다. 여자가 왜 말을 하지 않는가, 보다 말이 사라진 자리는 무엇이 대신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단단하게 걸어 잠그기 위해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문장은 이 소설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몸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상징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잘 쓰인 소설은 잘 깎인 다이아몬드처럼 어느 면을 바라봐도 빛이 나는 법이다. 나는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는 둘의 대화 장면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