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끝난 시간이 다음 회차였던 체인질링과 10분이나 겹쳐 허겁지겁 영화관을 가로질러 도착했다. 3시간이나 영화에 몰입했다가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음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조금은 걱정스러웠으나, 예매한 영화는 영화 시작 후에는 환불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서 그냥 뛰었다. 도착해보니 영화는 이미 시작해있었다. 보통의 나는 영화나 연극을 보기 전에 리뷰나 스포일러를 꼼꼼히 확인한다. 어떤 사람은 그게 공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말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으면 놓치게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재미를 조금 반감시키고 많은 부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룰은 내가 예매하거나 관심 있어 하는 공연에 한정된다. 남이 보여주는 공연은 사전 조사 없이 그냥 찾아가서 보고 돌아온다. 체인질링이 19세 관람가라는 사실은 입장하고 나서 자리를 찾기 위해 표를 살펴볼 때 알았다. 몰랐으면 좋으련만 알고 나니 은근히 긴장됐다. 요 근래에 본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쌍화점'이 유일한데 같이 본 이성분이 의식돼서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난다. 영화 트레일러 볼 땐 유괴관련 이야기처럼 보였는데 혹시 이것도?? 영화에 피가 나오든 신음소리가 나오든 탐탁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체인질링은 처음부터 후반부까지 계속 불편했다. 영화가 시작한 후 입장해서 앞부분을 놓친 것도 불편했고, 3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2시간 30분을 더 앉아있으며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도 불편했다. 결정적으로 영화 상영 2시간 동안 머리에 핏대가 설 정도로 '불편'했다. 사실 마지막 불편함이 가장 컸다. 1920~30년 대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와 맞물린 경찰의 무능과 부패, 언제나 사이코 패스는 존재한다. 같은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머리 속에 파고 들어왔다.

영화의 가장 큰 뼈대는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 명제에 그 시대의 온갖 부조리들이 나타난다. 트레일러만 보고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담은 영화겠거니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1차 대전 종전 후 남성 우월주의를 업은 공권력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거의 1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뤄온 것처럼 보이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경찰의 부패지수나 권력 남용이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다른 아이를 찾아온 경찰이 실수한 게 아니었던 건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와 짜고 월터인 척 연기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린 아이가 그 정도로 강력하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은, 나는 어려서 소년원에 안가요-라고 당돌하게 외치던 꼬마를 보며 추측하건데 노숙자로 떠돌던 아이에게 따뜻한 집과 먹을거리가 생긴다고 유혹했기 때문일 듯. 이러한 사실 말고도 나중에 드러나는 정황 증거들은 데려온 아이가 월터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실이 뻔 한데도 반장은 자기가 꾸민 연극을 사실이라 주장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실제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닌 프레임이다. 반장에게 '저 아이는 반드시 월터여야만 한다'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고, 프레임의 효과는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아이를 찾아 달라 애걸하는 엄마를 면박주고, 무시하고, 미친 사람 취급하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한다. 반장은 LAPD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적 소아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권력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반발은 곧 경찰 전체에 대한 반발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정신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 현장은 당시 여자들의 지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찰에 대항하는 여자는 무조건 코드 12 정신병원 행. 국가는 맘만 먹으면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 2009년 2월 17일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 병원 안에서 동조했던 간호사들과 의사도 눈에 띄었다. 나치 정권 시절 유태인을 가스실에 집어넣었던 대다수는 나치당의 열혈 당원들이 아니고 독일에서 예비군으로 소집된 평범한 아저씨들 이었다지? 뚜렷한 주관이 없는 개인들은 자신이 의료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경찰의 무능함이 두드러진다고 하기엔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경찰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건 윗대가리들이었지 경찰 조직 전체는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나 현명한 사람들은 있다.

그 시절에도 사이코 패스는 있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강호순은 사회에 불만이 전혀 없고 본인의 현재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었다고 했다. 신문에서는 다른 묻지마 살인마들과는 다른 유형의 전형적인 서구형 사이코 패쓰가 등장했다고 떠들었다. 그래 딱 그 범인이 서구형 싸.패의 전형이었다. 그냥 아이들을 잡아다가 그냥 죽였다. 도끼로 아이들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나중에 범인의 조카로 나온 아이가 자백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되서 숨이 막혔다. 고백하던 순간이 불편함의 절정이었다.

절정이 끝나고 20분가량의 통쾌한 결말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결말이었다. 살인마 사형, 시장 재선 출마 포기, 청장 사퇴, 반장 영구 정직, 정신병원에 감금된 코드 12 여성들 석방. 가장 큰 문제 하나만을 남겨두고 꼬여있던 문제들이 줄줄이 해결되었다. 영화가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영화 마지막 부분을 보고서야 알았다. 실제로 아이를 찾지 못했고, 영화에서도 아이는 찾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허구였다면 이런 식으로 결말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동의 쓰나미가 몰아치게 5년 후에 나타나는 아이가 월터와 함께 갇혀있었던 아이가 아닌 월터였겠지. 그래도 밝게 웃으며 '희망'을 얻었다는 졸리의 미소에서 나도 희망을 얻었다. 

기타.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곧바로 눈에 띈 건 졸리의 새빨간 입술. 이미 시작한 영화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와중에 새빨간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촌스러운 빨간색으로 칠해놔도 섹시-했다. 20세기 초 여성들은 모두 입술을 저렇게 칠하고 다녔을까. 내 기억 창고에 다른 등장인물의 입술색깔은 전혀 없는 걸 봐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나이스! 정말 예쁘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 리뷰를 써야겠다 생각했던 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대략 70분 동안 계속 눈물이 나서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왜 눈물이 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소가 죽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농군인 할아버지의 손을 보고 마음이 동했을까. 리뷰를 쓰기 위해 영화를 복기하다보니 첫 장면이 떠오르며 다시 마음이 뜨거워진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데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울컥했다.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오르는 노부부의 이미지는 할아버지의 "아이 아파"란 대사가 없어도 충분히 가슴을 저린다.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선 누군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생각났고, 고생하고 있는 엄마도 보였다. 다시 볼 땐 꼭 엄마랑 봐야지- 두 번째 볼 땐 엄마와 같이 봤다. 엄마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영화는 다큐이면서 영화를 지향한다. 보통의 다큐 영화와 달리 자막을 쓴 이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투리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고, KBS다큐 '인간 극장'이-시청자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자막을 쓰는 목적과 동일하다. 다큐의 본질은 사실성이다. 영화는 tv에 방송되는 다큐와는 달리 충분한 경제적 계산이 들어간다. 극장에서 다큐영화가 성공하기 어려운 건 사실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관객을 끌어들일 만큼의 재미도 있어야하는데 일상이 언제나 버라이어티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원래 심심하다. 다큐가 심심하지 않으려면 소재가 특이하거나 상황이 특별하거나 뭔가 특별해야한다. 거기에 감독의 역량이 플러스 된다. 워낭소리에서 특별한 점은 소가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 하나. 다른 부분은 눈 씻고 찾아봐도 특이점이 없다. 보통 20년인 소의 평균수명보다 2배 많은 40년을 넘게 살았다니 특이하긴 특이하다. 그런데 소가 나이 많은 건 '세상에 이런 일이'에 1회로 나올 수 있는 대략 10분짜리 꼭지다. 10분짜리 꼭지에서 한 편의 영화가 되기까지 할머니의 공이 컸다. 할아버지도 소도 워낙에 말이 없다. 가끔 "안 팔아"라고 외치는 할아버지가 웃음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웃음소스는 할머니에게서 나왔다. 할머니의 혼잣말과 표정이 압권이었다. 할머니의 팔자타령은 극에서 가장 중요한 웃음코드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없었다면 무성영화가 되었을 듯.


워낭소리는 느릿느릿 하다. 감독이 촬영하며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을 때, 할아버지와 소가 너무 느려서 촬영하기 힘들었다는 점을 꼽았다. 소와 할아버지의 속도는 촬영팀도 힘들게 했지만 자칫하면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정도의 사람들은 현실의 초고속 문명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워낭소리의 속도를 늘어지는 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정말 '편집의 승리'다. 편집은 지루한 소재를 재밌는 이야기로, 안단테의 템포를 모데라토로 느끼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들이 편집을 말할 때 사실을 왜곡하는데 사용하거나 '발 편집'이라고 비난할 때 사용한다. 애초에 영상이 매끄럽다면 편집이 생각나지도 않았겠지. 워낭소리에서도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 약간의 편집이 들어갔음직한 부분이 보였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작정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 눈에나 보일 법한 장면들이었다. - 작정하고 영화를 본 내눈에는 몇 몇 장면이 작위적으로 보였다.



할아버지네 논과 밭은 청정지역이다. 기계를 쓰고 농약을 치는 옆 논과 대비되는 화면으로 할머니의 인상 쓰는 표정이 나왔지만, 할아버지네 논에 사는 우렁이와 각종 수중생물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할아버지는 소에게 먹일 꼴을 베기 위해 논밭에 농약을 안친다고 말한다. "소가 없으면 나도 죽어."라는 대사도 나온다.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동물과 주인이 아닌 자식과 부모 관계였다. 우스갯소리로 영식이[둘째 아들]보다 소가 나아,라고 하는데 어쩌면 일리 있는 말 일지도. 할아버지가 소를 팔러 우시장에 갔을 때 '이 소가 차가 오면 저절로 피해요.' '내가 자는 사이에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 놨어요.' 그러니까 5백만 원 아니면 안 팔아! 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 "할아버지 이 소는 질겨서 먹지도 못해요." 할아버지와 소 판매상들 간의 인식 차이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자신의 다리이며 일하는 농기구이며 자동차의 역할도 한다. 판매상들에게 소는 단지 먹기 위해 사육하는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소를 팔지 못한다.



소와 할아버지는 참 많이도 닮았다. 어렸을 때 침을 잘 못 맞아 힘줄이 오그라든 할아버지의 왼쪽 다리와 소의 비쩍 마른 몸. 지독할 정도로 우직한 성격. "거 힘들다고 안 하면 되겠는 겨?" 할아버지는 대사로 소는 눈빛으로 말한다. 소머리 클로즈업 장면에선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충혈된 할아버지와 소. '아파'를 연발하는 할아버지와 헥헥대는 소. 정말 많이 닮았다. 한 줄로 영화를 요약한다면 이 문구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사족


원래는 6개월을 잡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소가 3년을 살아서 촬영도 3년으로 길어졌댄다. 소가 10년을 더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웃음이 났다. 촬영을 마치고 공중파 3사와 (아마도)ebs에 판권을 팔려고 돌아다녔는데 팔리지 않아서 인디 영화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가 성공할 줄은 감독도 방송사도 관객도 몰랐을 거다. 우리나라에서 독립피디로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스레 현실이 아득해졌다. <개봉하기 전에 친구가 워낭소리 언론 시사에 초대해 줬는데 가지 않았다. 그저 그런 인디영화인 줄 알았다. 제목이 워낭소리라 판소리와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벌레 2009-03-0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여운이 남네요...벌써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좋은 영화죠.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한권의 책을 읽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게 만든 공지영씨는 정말 대단하다. 처음엔 어머니에게 책 선물을 드리려고 샀다. 내가 먼저 깨끗하게 읽고 포장해서 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어서 책이 지저분해졌다. 어머니에겐 새로 책을 사서 드려야지-. 책을 읽을 땐 책의 겉면과 책날개를 먼저 읽는다. 책 뒷면에는 저명한 인사들의 서평이 간략하게 나와 있는 경우도 있고 신문기자들의 평이 소개되어있는 때도 있다. 어떨 땐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에는 책 내용이 몇 줄 적혀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구절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마 집이었다면 엉엉 울었겠지. 지하철에서 울 수는 없었다. 지하철 밖으로 고개를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문단을 읽었을 뿐인데 마음이 요동쳤다. 어릴 적 운동회의 엄마도 위녕을 부르는 공지영씨처럼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그때의 엄마도 지금의 엄마도 언제나 나를 응원하고 있다. 요즘엔 자주 이 사실을 까먹는다. 그래,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가 인생길에서 후진을 하고 있어도 응원했다. "그때 엄마가 너를 밀어주길 참 잘했지." 가끔 엄마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4년 동안 언제나 엄마가 있었다.




나이가 들며 점차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기억력이 감퇴하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일을 해도 자꾸자꾸 까먹으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그래서 일 년이 한 달처럼 지나가고 나중에는 일 년이 일주일처럼 지나가는 건 아닐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반복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해보는 일은 모두 처음해보는 일 신기한 일투성이였는데 20대 중반이 된 내 나이만 되어도 새로운 일들은 손에 꼽는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니 기억할 만 한 것도 특별한 것도 없다. 재수 생활을 할 때의 시간흐름과 작년 한 해를 따지면 재수학원에서의 1년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작년 한 해는 정말 길었다. 학교도 다니고 봉사활동도하고 여행도 하고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했다. 하루는 짧았지만 한 달은 길게 느껴졌다. "삶을 길게 산다는 것은, 오래 산다는 것은 시간의 잔인함에 내맡겨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 내 하루는 언제나 길기를 소망한다. 매순간을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은-살아지는 것이 아닌-온전히 나의 몫이다.
 



언젠가부터 머리가 굳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나마 20대는 생각이 유연하고 30대부터는 사고가 경직돼서 바꿀 수가 없다는 말이 와 닿았다. 옳다고 믿는 것들, 당연하다고 의심치 않는 것들을 두고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조차 사라졌다. 나이가 들며 질문이 사라지는 것과 머리가 굳어가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려나. 어릴 적엔 세상이 부조리했다-부조리해 보였다-. 항상 반항했고 '대학 같은 건 개나줘'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지금은, 멀쩡히 대학에 다니며 착실히 공부할 계획을 세우며 어떻게 하면 불투명한 미래를 밝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산다. 살고 있는 세상의 체계를 습득해 만든 아비투스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시류에 편승했다고 인정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을테니까- 같은 자기 위안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한다. 머리가 굳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여전히 연령주의가 싫고, 권위주의와 마초를 배척하고, 생활의 진보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이념의 진보화, 생활의 보수화가 정착되어 가는 게 눈에 보인다. 이걸 막으려면 끊임없이 질문해야한다. 질문은 굳어가는 머리에 윤활유가 될 것이다.




친한 친구들 몇 명과는 격의 없이 대화한다. 이 '격의 없음'은 곧 비속어와 욕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 비속어는 친함의 척도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다. 친하지 않으면 욕 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욕하는 행동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을 읽고 나서 심한 부끄러움과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부끄러움은 지금까지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안도감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아 다행이라는 마음에서 나왔다. 내뱉은 욕들과 말들은 그대로 허공에 흩뿌려지는 게 아니었다. 허공을 떠돌다가 어딘가에 가라앉게 되는데 그게 우리가 먹을 농작물이라면 욕이 뭍은 작물이 몸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된다. 끔찍했다. 말은 함부로 내뱉을 게 아니었다. 생각하다보니 몇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똑같은 증류수를 몇 컵 떠다놓고 한 개의 컵에는 사랑해, 좋아해 같은 말들과 아름다운 음악들을 틀어주고 다른 컵에는 욕과 저주를 퍼부었다. 똑같은 행동을 며칠 정도 하고 나서 물 결정을 살펴보니. 좋은 말과 사랑을 준 물은 물의 결정이 정확히 육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욕을 했던 컵의 물은 결정이 깨지거나 알 수 없는 형태로 흩어져 있었다. 또 다른 일화로는 어떤 원시 부족에서 나무를 베어다 쓰는데 돌도끼로 벨 수 없는 큰 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나무에 대고 온갖 험한 말들과 고함 욕을 한다. 그러면 나무가 금방 죽어서 쉽게 벨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진 말이다. 책을 읽고 나서 그 뒤로는 욕을 자제하려고 애쓴다. 아직은 가끔씩 튀어나오지만 좀더 자제하다보면 언젠간 내 입에서 욕 나올 일은 사라지겠지.




"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이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리 상처 입히려 애써도 내가 상처 받지 않으면 그 뿐이고, 의도치 않은 다른 이의 말에 상처를 만드는 것은 내 자신이다. 결국 상처 받는 건 나에게 달린 문제다. 언젠가 친구와 노는 동안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상처받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안의 자격지심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려는 순간 이 구절을 떠올렸다. 친구의 의도를 유치함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순진성을 발견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답답한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었다.




무작정 리뷰를 쓰다 보니 글의 흐름이 끊어져 있는 게 보인다. 이런 옴니버스 식 책은 어떤 걸 주제로 잡고 어떻게 감상문을 써야할 지 아직 모르겠다. 한 가지 주제로 굳이 엮기보다 내가 원하는 주제를 뽑아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가슴에 박힌 구절 "인생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책이 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칠리아의 암소 - ...한줌의 부도덕
진중권 지음 / 다우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시칠리아의 암소는 고대 시칠리아의 사형기구였다. 기요틴을 제작한 이와 마찬가지로 이 기구를 만든 제작자도 자신의 기술로 사형을 당한다. 시칠리아의 암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걸로 어떻게 사형을 시켰는지 궁금했으나 책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작가는 도리어 '그냥' 이런 제목을 썼다고 말한다. 2000년도에 나온 시사 관련 책을 2009년에 읽으려니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알고 있는 이야기는 스타 블로거로 활약 중인 한윤형씨의 고등학교 때 일화 정도? 이 책이 나올 당시의 나는 중딩 꼬꼬마였고, 한참 연예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나에게 시사나 상식이 있었을 리가. 그래서 책을 읽는 게 참 더뎠다. 책을 언제 손에 잡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책 읽는 속도가 더뎠다. 알듯 말듯 하면서도 머리에 박히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 6장 정신, 유희, 구원에서는 도리어 아는 게 없으니 빨리 빨리 읽을 수 있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쓴 칼럼이 아니었던 건가?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았는데 6장의 첫 번째 칼럼과 두 번째 칼럼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호라 통재라! 철학적 상식의 부재가 이렇게 뼈아플쏘냐.. 
 


사실 책머리에 나와 있는 말처럼 이 책은 진중권씨의 배설물이다. 많은 곳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어서 그럴지는 몰라도, 한 가지 주제로 엮을 수도 없고 온갖 주제들이 정신없이 난타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9년 전 계간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앞부분을 읽고 있을 때는 동저 '호모코레아니쿠스'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나 호모~는 훨씬 더 문체가 부드럽고 좀 더 대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모~도 칼럼을 엮어 낸 책이다. 강산이 변하는 동안 진중권의 글쓰기도 유하게 변했다- 시칠리아의 암소는 무지한 내 자신을 탓함과 동시에 이런 책을 읽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여러 철학자들과 미학이론에 대한 완역본을 읽으며 내 생각을 정립하는 연습을 해야지, 이렇게 남이 배설해 놓은 생각만 주워 먹는 것으로는 절대 아무것도 될 수 없겠구나- 싶었다.  도움이 된 게 있다면 들뢰즈가 시뮬라르크에 대해 정의내린 것에 관심이 생겼고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조가 궁금해졌다. 유희하는 글쓰기가 제일 중요한 것이며 좌파로 살고자 하는 나에게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지에 대한 통찰도 주었다.

물론 거기까지였다- 현대의 정치사를 몰라서는 안 되겠지만 현 시류의 정치, 사회 이야기도 잘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9년 전의 강철 김영환이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닐까? 진교수가 당부한대로 이런 남이 사정해놓은 글은 그만 읽고 생각을 정립하는 시기를 가져야겠다. 제일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이 머리에 든 거 없으면서 활동력만 왕성한 좌파들 아닌가. 하고 있는 정당 활동이나 여러 가지 활동을 살펴보니 내가 지금 딱 상종 못 할 그 꼴로 달려가고 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둘러봐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책 읽자 책 읽자 책을 좍좍 넘기자.

 

책 내용에 대한 언급은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주제가 없어서 포기. 그냥 중궈의 마음속을 잠시 엿본 느낌이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만 하나 골라 언급하고 마치겠다.

『 자,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자. 선택하기도 전에 내게 강제로 주어진 삶의 양식, 사회적 가치관, 세계관 등. 이를 한번 의심에 붙이고, 통념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평균치에 구애받음 없이 나 스스로 내 삶의 목표를 정하고, 내 가치를 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으로 내 행위를 규제할 내 도덕을 내가 만들어 쓰는 거다. 이렇게 스스로 창조한 게임 규칙에 따라 내 삶을 이끌어나감으로써 삶을 작품으로 가꾸어 가는 것, 자기에의 배려. 이게 나의 주관적 미적 이데올로기. 인간은, 아니 적어도 나는, 제멋에 살 때 가장 행복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 지성사로 읽는 예술
강유원.김용섭 지음 / 미토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전작주의의 발현으로 사게 된 책. '강유원' 이라는 이름 석자에 걸린 신뢰는, 심지어 책의 목차조차 확인하지 않고 클릭 몇 번으로 배송된 책을 마주하게 해줬다. 이름도 '삶은 늘 우리를 배반 한다' 아닌가- 부제 지성사로 읽는 '예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책 겉면이 모나리자 패러디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강유원은 미학자가 아닌데? 이 책이 철저하게 예술의,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책 이라는 사실은 책을 몇장 넘기자 마자 알게 되었다. 텍스트 반에 그림 반,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럴리가 없는데? 찬찬히 책을 살피며 난감했다. 미술이나 미학에 관련된 책이라고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미학 오딧세이', 아주 잠깐 훑어본 '시뮬라시옹'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저 책들을 읽는 내내 낑낑대며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도 만만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책이 얇았고 걸작의 도판들이 반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 이정도면 해볼만 하겠다-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을 들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책이 얇은 대신에 넓은 책면 때문에 한 쪽에 두페이지 정도 분량의 글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작품을 설명하는 주석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얇고 가벼운 책->쉽지 않은 책으로 둔갑했다.


현실과 예술은 떨어질 수 없는 한쌍이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은 미술의 문외한인 나에게도 종종 들려오는 말이니까. 그렇다고 이 둘이 붙어있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예술가가 아닌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현실의 눈, 시대의 눈을 사용한다. 예술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안목 속에 존재한다. 이 책의 부제인 '지성사로 읽는 예술'은 역사의 흐름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겠다고 말한다. 칸트 구성설을 빌어 예술의 정의를 설명해 놓은 게 흥미로웠다. 객관세계와 주관-인간의 것이 아닌 초월의 것-의 관계에서 주관이 주도를 잡게 되는데, 이것을 예술에 적용하면 객관적 자료의 집합은 예술이 될 수 없고 주관의 영역에서 예술이 결정된다.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되는 것이다." 현실의 눈으로 작품을 바라보는데 어찌 현실과 예술이 떨어질 수 있을까?


책은 계속 역사적 흐름과 그에 따른 예술의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상주의까지 역사가 반복되면 예술도 반복되었다. 각 시대에 따른 예술의 경향은 나 같은 미학 초심자들도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역사는 교양수준으로 알고 있으면 맥락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미술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강유원의 논지 전개방식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아- 역시 나에게 미술은 어렵고나. 하다가 문득, 클림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게 떠올랐다. 작년 고흐 때 어영부영하다 전시 기간을 놓쳤는데 클림트는 놓칠 수 없지. 미술도 초짜 미학도 초짜, 고등학교 세계사 책에 나온 미술 작품 말고 다른 작품은 잘 모르는 미술의 문외한은 한 권의 책으로 클림트 전시회 티켓을 예매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