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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 지성사로 읽는 예술
강유원.김용섭 지음 / 미토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전작주의의 발현으로 사게 된 책. '강유원' 이라는 이름 석자에 걸린 신뢰는, 심지어 책의 목차조차 확인하지 않고 클릭 몇 번으로 배송된 책을 마주하게 해줬다. 이름도 '삶은 늘 우리를 배반 한다' 아닌가- 부제 지성사로 읽는 '예술'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책 겉면이 모나리자 패러디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강유원은 미학자가 아닌데? 이 책이 철저하게 예술의,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책 이라는 사실은 책을 몇장 넘기자 마자 알게 되었다. 텍스트 반에 그림 반,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럴리가 없는데? 찬찬히 책을 살피며 난감했다. 미술이나 미학에 관련된 책이라고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미학 오딧세이', 아주 잠깐 훑어본 '시뮬라시옹'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저 책들을 읽는 내내 낑낑대며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도 만만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책이 얇았고 걸작의 도판들이 반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 이정도면 해볼만 하겠다-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을 들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책이 얇은 대신에 넓은 책면 때문에 한 쪽에 두페이지 정도 분량의 글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작품을 설명하는 주석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얇고 가벼운 책->쉽지 않은 책으로 둔갑했다.
현실과 예술은 떨어질 수 없는 한쌍이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말은 미술의 문외한인 나에게도 종종 들려오는 말이니까. 그렇다고 이 둘이 붙어있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예술가가 아닌 우리는 예술을 바라볼 때 현실의 눈, 시대의 눈을 사용한다. 예술은 독립적인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안목 속에 존재한다. 이 책의 부제인 '지성사로 읽는 예술'은 역사의 흐름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겠다고 말한다. 칸트 구성설을 빌어 예술의 정의를 설명해 놓은 게 흥미로웠다. 객관세계와 주관-인간의 것이 아닌 초월의 것-의 관계에서 주관이 주도를 잡게 되는데, 이것을 예술에 적용하면 객관적 자료의 집합은 예술이 될 수 없고 주관의 영역에서 예술이 결정된다.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보겠다고 마음 먹으면 되는 것이다." 현실의 눈으로 작품을 바라보는데 어찌 현실과 예술이 떨어질 수 있을까?
책은 계속 역사적 흐름과 그에 따른 예술의 경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상주의까지 역사가 반복되면 예술도 반복되었다. 각 시대에 따른 예술의 경향은 나 같은 미학 초심자들도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역사는 교양수준으로 알고 있으면 맥락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미술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강유원의 논지 전개방식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아- 역시 나에게 미술은 어렵고나. 하다가 문득, 클림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게 떠올랐다. 작년 고흐 때 어영부영하다 전시 기간을 놓쳤는데 클림트는 놓칠 수 없지. 미술도 초짜 미학도 초짜, 고등학교 세계사 책에 나온 미술 작품 말고 다른 작품은 잘 모르는 미술의 문외한은 한 권의 책으로 클림트 전시회 티켓을 예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