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앨리스 먼로 지음, 김명주 옮김 / 따뜻한손 / 2006년 1월
절판


염소가 돌아온 것은 우리 인간사와 커다란 관련은 없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라의 출현은 클라크와 나에게 깊은 변화를 일으켰어.
적대감을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환영을 보고 기절할 듯 놀라게 될 때,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결속이 생겨나는 법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나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야.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정말 하나가 되는 거지.
플로라라는 존재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천사 역할을 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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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 - 120 True Stories & Innocent Lies
황경신 지음, 김원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0월
품절


기자생활의 초창기, 밤범신 선생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인터뷰 내용 역시 까마득하지만 그후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마 작가의 감성이랄까 감수성이랄까 그런 이야기 도중이었던 것 같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내 머릿속에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 다녔어.
그저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겨우 몇 마리만 날아다니는 것 같아.
애를 써야 한두 마리 잡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거지.

육체에 새겨지고 마음에 엉겨 붙는 것,
오고 싶을 때 왔다가 가고 싶을 때 가는 것.
제대로 익히면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방심하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끈적거리는 것.
그러나 기억이 빠져나간 시간, 장소, 물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소유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그 어떤 물건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가난해진다.
가난해지면, 쓸쓸해진다.

사랑 때문에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모조리 기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당신이 좋으실 대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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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품절


졸음을 부추기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숲 쪽에서 지붕 너머로 왕얼룩나비가 날아왔다.
타오르는 불길 위를 휘돌던 나비가 마당을 너울너울 날아다녔다.
날개가 흰바탕에 검은 줄무늬인 나비는 문득 날갯짓을 멈추는가 싶더니 V자로 접고 천천히 내려와, 깨진 조작 오목한 곳에 어린 빛에 입을 갖다 댔다.
숲과 강가와 밭 쪽에서 나비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제비나비, 청띠신선나비, 가랑잎나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비들까지 포함해 수십 마리의 나비 떼가 마당을 날아다니다 흩어진 단지 조작 위에 내려앉았다.
파편을 뒤덮은 가지각색의 나비 날개들이 나풀거렸다.
노랑 머리띠를 두른 청년이 불 속으로 잡지를 던져 넣었다.
불꽃이 튀어 올라도 나비 떼는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개 빛깔들이 아름다웠다.
파란 여름 하늘 안쪽에 아직 이 세계로 내려오지 못한 무수한 나비들이 날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흰 플라스틱 테이블을 노천에 늘어놓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점심도 먹고 사진도 많이 찍어 주었어.
친구한테 빌려 온 카메라로 해양 박람회장을 배경으로, 혹은 바다, 호텔 앞, 도료 옆에다 나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었지.
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 사진은커녕 어릴 적 사진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다 큰 뒤에 찍은 사진도 거의 없었으니까 무척 기뻤단다.
지금 내 모습이 남는 다는 생각을 하니 신기하기조차 했어.
사진 찍는 것 따위로 너무 수선을 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기뻤던 거야.
그 사람이 나를 찍어 준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좋았어.
다만 그 사람과 함께 찍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웠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는데.
딴 사람에게 찍어 달라고 했으면 좋았으련만,
함께 찍자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어.
그게 지금까지도 너무 후회스러워.
얼마 후 그 사람은 떠나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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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야기 10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투우치 자쿠초.김난주 옮김, 김유천 감수 / 한길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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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할 정도로 늘 속절없이 끝났던 사랑 하나하나를 절절하게 생각하면서 침울해하는 해질 녘,
사뭇 허망하게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거기 있는 듯한데
손에는 잡히지 않고
분명 봤다고 여겼더니
단박에 행방도 알 수 없이
묘연하게 사라진 하루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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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야기 9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투우치 자쿠초.김난주 옮김, 김유천 감수 / 한길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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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참억새의 가슴에 품은 연심
사뭇 애틋하게 이슬에 젖은
옷자락으로 손짓하는 억새처럼
유혹하는 편지 부지런하니

이렇게 흥얼거리며 니오노미야는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익숙한 옷에 평상복만 걸친 모습으로 비파를 퉁기고 있습니다.
황종조의 가락으로 마음을 절절하게 파고들도록 연주하니,
작은아씨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곡이라 언제까지고 토라져 있을 수만은 없어 휘장 끝에 놓여 있는 조그만 사방침에 기대어 있습니다.
얼핏 보이는 그 얼굴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큼 귀엽습니다.

가을도 지난 들판의 모습은
희미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듯이
내게 싫증난 당신의 마음은
몸짓으로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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