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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고작 싸움이나 하라고 서울로 온 줄 아냐?”
“싸움이 아니라 스포츠예요.”
“그래, 나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춤쟁이라고 하더라. 그게 세상이야!”
“세상이 뭐라고 해도, 아버지는 춤추셨잖아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날 안 받아줬다. 춤은 그나마 다른 사람하고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고. 사지 멀쩡한 놈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쌈질을 하겠다고······.”
“다른 사람하고 별로 잘 산 것 같지도 않은데요.”
짝!
아버지가 내 뺨을 내리쳤다.
“아버지가 제 몸 같았으면 춤······ 안 추셨겠네요.”
짝!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내 뺨을 내려쳤다. 예상했고 피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춤을 춰서, 세상이 더 받아주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짝! 짝! 짝!
볼이 얼얼했다. 삼촌이 나 대신 울었다.
“그런 춤! 고얀 놈.”
아버지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소설가. 내 꿈이 아니라 아버지의 꿈이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나는 소설의 ‘소’자도 모른다. 가끔은 만날 보는 글자가 생소해 보일 때도 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내 몸에 붙지 않는 소설가. 저 그거 관심 없습니다.
89-90쪽,「종이 한 장 차이」
“아닌 걸 아니라고 어떻게 보여줘? 지나가는 아저씨들 붙잡고 나랑 그런 사이 아니죠, 그래? 맞는 걸 증명하는 것보다 아닌 걸 증명하는 게 더 어렵더라.”
94쪽,「종이 한 장 차이」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지고 계속 놀려먹는다만,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려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가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
“뭐가요!”
“그 '뭐' 말이야, 새끼야. 니 나이 때는 그 뭐가 좆나게 쪽팔린데, 나중에 나이 먹으면 쪽팔려 한 게 더 쪽팔려져. 나가, 새끼야. 나 졸려.”
136-137쪽,「원 투 차차차, 쓰리 투 차차차」
이 세상이 나만 당당하면 돼, 해서 정말 당당해지는 세상인가? 남이 무슨 상관이냐고? 남이 바글바글한 세상이니까! 호킹 박사처럼 몇 안 되는 모델을 두고 그런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1등만이 특별한, 나머지는 1등의 언저리로 밀려나 있어야 하는······. 내 아버지는 호킹 박사 같은 1등 대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높기만 한 지하철 손잡이를 마음 편하게 잡고 싶을 뿐이다. 떳떳한 요구조차 떳떳하게 하지 못하게 요구해야 하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 내 입으로 말하라고? 아버지는 이미 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걸 굳이 아들인 내가 확인사살 해줘야 하나? 자기들은, 내 아버지는 비장애인입니다, 하고 다니나? 좆같다, 씨발. 내가 부러뜨린 갈비뼈만 아니었으면 문병 안 갔다. 똥주, 이 인간은 어쩌면 그렇게 한 대 패주고 싶은 말만 하는지. 138쪽,「원 투 차차차, 쓰리 투 차차차」
장애라는 말에 아버지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사람한테는 죽을 때까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있다. 들을수록 더 듣기 싫고 미치도록 적응 안 되는 말 말이다.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닌데, 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슴을 치는 말은 한 번 두 번 세 번이 쌓여 뭉텅이로 가슴을 짓누른다.
196쪽,「T.K.O. 레퍼리 스톱」
“저도 아버지가 항상 신나게 추는 줄 알았어요.”
“내가 춤을 추면 사람들이 자꾸 웃어대니까, 신나지는 않았다······.”
“······.”
“그 영감이 ‘네 몸땡이는 멀쩡한데, 네 정신 상태가 문제야.’ 했을 대는 처음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내 몸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랬더니 내가 숙소에서도 안 나오고, 남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혀를 차더라.”
“예?”
“너도 잘 모르겠지? 그 영감이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한다니까.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친구도 없는 인간이, 제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하겠어.’ 그러는데, 그때 좀 알겠더라.”
“아······.”
확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는 알 것도 같았다.
“너, 친구 없다면서?”
“있어요······.”
“누구?”
“······.”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애들은 많은데, 이름을 댈 수 있는 애는 왜 없지? 처음에는 그 애들이 나를 피했던 것 같고, 나중에는 내가 피했던 것 같다. 기분 좀 그러네. 이름을 댈 수 있는 친구라. 혁주? 이 똘아이 새끼는 왜 갑자기 생각나는 거야.
“그 영감 덕에 민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하고도 좀 어울렸다. 죽었는데 어떨 때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려. 만날 나만 보면 ‘너 그렇게 살지마.’ 했는데, 지금도 가끔 그 목소리가 들린다니까. 산 사람이면 시끄럽다고 뭐라고나 하지. 죽은 영감이 내 속에 척 들어앉아서 자꾸 나를 혼낸다. 하하하.”
“그런 게 어디있어요?”
“근데, 그런 게······ 있더라. 나 죽으면, 너도 나 원망할래?”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 원망해요?”
“가끔. 내 정곡을 얼마나 꾹꾹 찔렀나 몰라. 그래도 좋은 영감이었지.”
“그럼 됐지 뭘요.”
“완득아.”
“네.”
“우리 서로 인정하고 살자.”
“뭘 인정해요?”
“너는 내 춤을 인정해주고, 나는 네 운동을 인정해주고. 우리 몸이 그것밖에는 못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킥복싱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저 얘기를 하려고 죽은 영감까지 들먹이며 폼을 잡았나. 하긴 그렇게 반대를 했으니······.
“흠, 저 아버지 춤추는 거 별로 안 싫어했어요. 어렸을 때 삼촌 따라 자이브 추다가 아버지한테 맞아서 그랬지.”
“춤춘다고 때렸냐? 하도 틀리니까 때렸지. 누굴 닮아서 그렇게 몸치냐?”
나는 안다. 내가 춤을 춰서 때렸다는 걸. 아버지는 자신의 몸도 춤도 내게 물려주기 싫어했다. 누가 나를 보며 웃는 것조차도.
“아버지 닮았나 보죠.”
“하긴, 내가 춤을 안 췄으면, 복싱 좀 했을 거다. 리듬감이라는 게 꼭 춤출 때만 필요한 게 아니야. 운동도 다 리듬감이 있어야 돼.”
아버지가 똥주하고 너무 어울린 모양이다. 아버지한테 슬슬 똥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녀석······ 다리 긴 것 좀 봐. 근사하게 컸네······.”
아버지가 내 허벅지를 툭툭 친다. 근사하게 컸다는데 왜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야. 아버지 눈이 갑자기 빨갛게 되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눈이 아팠다.
지난봄, 똥주를 만났다. 그리고 똥주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때 즈음 나는 킥복싱을 시작했다. 킥복싱은 미치도록 좋았다. 싫다와 좋다가 한꺼번에 내게 왔다.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러 교회를 찾았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새로 찾은 기분이다.199-203쪽,「T.K.O. 레퍼리 스톱」
아버지와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 이 열등감이 아버지를 키웠을 테고 이제 나도 키울 것이다. 열등감 이 녀석, 은근히 사람 노력하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영 나쁜 것 같지도 않은 게 딱 똥주다.
204쪽,「T.K.O. 레퍼리 스톱」
“그래서 죽도록 공부하는 거야?”
“너도 만날 맞으면서 또 운동하잖아, 네 꿈을 위해서. 나도 그래. 내 꿈을 위해서 죽어라고 공부하는 거야. 내가 나중에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배워두는 거라고.”
“그걸 꼭 대학 가서 배워야 하냐?”
“넌 꼭 체육관에 가서 운동해야 하니?”
“뭐?”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게 있는 곳에서,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하는 거 아냐. 너 태권도장 가서 킥복싱 하겠다고 하면 누가 가르쳐줘? 아무 지식도 자격도 없이, 카메라 한 대 들고 전쟁터 누비면 다 취재할 수 있대?”
“하여간 말은 되게 잘해.”
“배울 거 다 배우고, 세상이 나한테 뭐라고 못 하게 만든 뒤에, 뛰어다닐 거야. 내 이름을 걸고 취재하러 다닐 거라고.” 211-212쪽,「첫 키스는 달콤하지 않았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니. 니가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 때 상대가 벌처럼 쏘면 어떡할래? 우아하게 날갯짓하게 누가 그냥 둔대? 잊지 마라. 침착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야.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힘껏 당긴 고무줄을 탁! 놓은 것처럼 빠르고 깊게.”
222-223쪽,「첫 키스는 달콤하지 않았다」
하―. 이 동네 집들 진짜 따닥따닥 붙어 있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기에 딱 좋은 동네였다. 왜 숨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사실은 너무 오래 숨어 있어서 두렵기 시작했는데, 그저 숨는 것밖에 몰라 계속 숨어 있었다. 그런 나를 똥주가 찾아냈다. 어떤 때는 아직 숨지도 못했는데 “거기, 도완득!” 하고 외쳤다. 술래에 재미를 붙였는지 오밤중에도 찾아댔다. 그래도 똥주가 순진하기는 하다······. 나를 찾았으면 자기가 숨을 차례인데, 내가 또 숨어도 꼬박꼬박 찾아줬다. 좋다. 숨었다 걸렸으니 이제는 내가 술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233쪽,「못 찾겠다, 꾀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