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빠가 돌아왔다」 : 앙큼하고 잔망스러운 중학생 계집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정 내 권력구조의 서사. 그런데 중학생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어려운 어휘 선택이랄까. 뭐, 거기서 오는 위화감이 더 돋보인다고 할 수 밖에.


「이사」 : 김영하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많이 이사를 다녔을 것이다. 그러한 생활체험이 이 소설에 지나가는 황사처럼 어느 정도 묻어있을까? 


「보물선」 : 몽상가의 어긋나는 인생.  


「그림자를 판 사나이」 : 혼자사는 소설가(글밥 먹는 이)의 그림자를 훔쳐본 듯한 느낌. 애잔하다. 


「너를 사랑하고도」

왜 하필 그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후로도 모욕을 받거나 궁지에 몰리면 여지없이 그 이미지가 집요하게 점멸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모욕을 되갚아주거나 궁지를 탈출할 기력마저 잃어버리곤 하였다. 얼굴도 없이 오로지 몸통만으로 된 그 이미지는 마치 무슨 토르소 조각 같았다. 위기의 국면, 모멸의 순간마다 그 토르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힘내라구! 175


냉소를 고급 넥타이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는 아무것에도 냉소할 수 없는 사람이면서 입만 열면 찬바람이 쌩쌩이었다. 그게 한갓 포즈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어수룩하여 쉽게 모든 것을 들키고 만다. 영악한 여자들은 그걸 눈감아주는 대가로 많은 것을 얻는다. 175


남자들이 왜 기를 쓰고 성공하려고 하는지 알아?

몰라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야.

177


넌 이해 못 해.

노력해볼 테니 얘기해봐요.

187


야 인마, 냉소적인 인간이 함부로 진지해지면 큰일나. 갑자기 인생이 정색을 하고 달려들거든. 지금이라도 의원한테 가서 빌어. 따라가겠다고. 그리고 거기 가서 계속 냉소적으로 살아. 그게 좋아. 192


읽고 또 읽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설픈 불가지론자가 되어 나는 토익 책을 펼쳐들었다.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취업을 하면 뭔가 나아지겠지. 나는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어휘와 문장의 숲에서 벌이는 이 전투가 과연 언제 끝날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197


밑줄 그은 부분이 많았던 단편.



너의 의미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늘어지고 광대무변해보였던 가능성의세계는 일 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욕이 생긴다.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퀴퀴한 냄새도 비로소 코를 간지럽힌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잡지 서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낡지 않은 것들이 주는 달콤함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201 202


도덕적으로 살면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 주차위반 딱지도, 죄의식도, 전과도 없다. 도덕이라는 게 별건가. 행동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게 잘돼 있으면, 그리고 그게 그 사회의 도덕과 비슷하면 그것처럼 편리한 게 없다.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더는 피곤한 게 없는 삶. 그런 사람에게 인생이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해도, 경부고속도로 같은 것이다.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꾸준히 가기만 하면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나는 도덕적인 삶만이 순탄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이 어찌 범인의 그것과 같으랴. 우리 예술가들은 위반을 통해서 배우고 고난을 딛고 성숙하는 존재들이다, 이거지.

210


처음 그녀를 만났던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자주 오게 되면 도서관도 더이상 에로틱하지 않다. 들어서자마자 목표한 책으로 그대로 돌진하게 된다. 일체의 전희도 애무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중년의 섹스처럼 되어버린다. 228 


도서관의 에로스를 이렇게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혹시 있다면 알려주시라.)



마지막 손님

243

모든것에 불투명한 태도를 보이면서 심지어 그것을 멋으로 생각하는 남자들


크리스마스 캐럴

사죄 같은 걸 받자고 하는 얘기 아니야. 너희가 사죄할 게 뭐 있어? 그때의 내가 나 자신을 걸레로 여기고 있었다는 게 사실 가장 큰 문제였어. 여자가 자기를 걸레로 여기고 있는데 누가 사람 대접을 해주겟어? 269


아마, 말들은 안 했지만 그날 진숙을 향해서, 태연히 그들의 치부를 드러냈던 진숙에 대해서 살의를 느끼지 않은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진숙이 피살되었을 때, 모두 자기손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칼질을 해댄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밤에 나는 정말로 아무 일 없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사실 그 동안 그들의 꿈속에서 진숙은 여러 번 살해되었다. 그녀의 피는 끝이 없었다. 속죄는 가능하지 않았다. 짓지 않은 죄는 참회할 수 없었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참회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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