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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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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얼마 전에 읽었던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이 우리 나라에서 낸 첫 에세이다. 초판 발행일은 1992년 4월 30일. 이렇게 곧장 또 한 권의 책을 읽은 걸 보니, 내가 그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그 '반함'에는 외모에 대한 나름의 추측도 포함되었던지, 표지의 앞날개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둥그런 얼굴에 뿔테 안경, 그 뒤에서 무엇인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두 눈, 꽉 다문 입술, 둔중한 느낌의 코... 섬세한 언어를 구사하는 여린 감성의 에세이스트답지 않게 그는 무척이나 단단한 표정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 마음대로 그가 길쭉한 손가락을 가진, 야리야리한 샌님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긴, 그 여린 감성에 무너져내리지 않고 이처럼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일이 어지간한 '단단함'으로 가능하기나 했을까.

<소년의 눈물>이 그가 어려서부터 읽어왔던 책들을 통해 그 특유의 감수성과 식민지배와 분단이 남긴 슬픈 가족사를 드러내 보였다면, 이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는 그가 서양의 백여 개의 미술관, 박물관, 성당 등에서 만났던 그림들이 책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의 순례기를 읽고 있자면, 그림을 나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는 객관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역사와 감정의 맥락에서 자리를 움직이고, 부름에 답하고, 또 나를 부르는 지극히 사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림 독법은 미술사나 미학 이론과 같은 외부의 요소들보다는 자신을 그 먼 유럽의 미술관에까지 가게 한 천형(天刑)과도 같은 의무감과 부채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으스스한 사해(死骸)의 취미를 가졌던 15세기 화가들의 세계관이나 17세기 정물화나 초상화 등에서 나타난 극사실주의의 경향 등 미술사적인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도 모두 그의 맥락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의 맥락이란, 이번에도 역시 두 형을 20년 가까이 차가운 감방 속에 있게 한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견고한 독선을 말하는 것이다. 순수한, 그리고 어쩌면 무모한 열정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던 두 형이 감방 안에서 젊음을 다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옥바라지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갔고, 그와 누이는 두 사람의 석방을 위해 마찬가지로 젊음을 다 바쳤다. 말하자면, 그들 가족 모두는 역사가 빚어낸 비극에 전 생애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일본인이오?"라는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 단호함은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1990년 2월의 어느 날, 저자는 나폴레옹 군에 대한 스페인의 독립전쟁을 묘사한 고야의 판화집 '전쟁의 참화' 중에서 <1808년 5월 3일, 쁘린씨뻬 삐오 언덕의 총살>의 복제품을 사들고 서울의 공항을 들어선다. 그는 그 그림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던 한국의 세관원들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국 정부의 폭력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과 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의 프랑꼬 군사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바스끄의 작은 도시 게르니까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 일에 분노한 피카소의 '게르니까'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앞에서 1980년의 광주를 떠올린 그는 왜 우리 민족은 숱한 굴욕과 수탈과 살육을 겪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게르니까'를 탄생시키지 못했는가를 묻는다.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아직 가볍단 말인가."

책을 읽는 중에 느끼는 감정들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는 언어를 내가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경식의 산문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조심스럽게 읽힌다. 혹시 부스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그 저항의 속살을 한 겹 한 겹 벗겨낸다. 다독의 욕심에 휘리릭 읽어버렸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글이다. 고난에 찬 그의 삶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자신이 감내해야 할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를 위해 고투를 벌이던 고흐에게, 그에서 오는 모든 힘겨움을 참고 견뎌주던 아우 테오가 있었듯, 서준식과 서승에게는 서경식이라는 아우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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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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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미소짓는다. 하나하나 익혀나가는 문자와 언어, 먼 미지의 나라의 역사와 풍물, 저 오랜 옛날 전쟁과 사랑의 이야기들……. 지식의 빛줄기가 소년의 뺨을 밝게 비춘다. 햇살과 단비를 맞으며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조금씩 쌓여가는 지식들. 그 지식은 바로 소년의 즐거움이었다. (p.14)

런던 미술관을 돌아보던 저자 서경식은 17세기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소년'이라는 그림을 보고 지식의 세계에 눈을 떠가는 소년의 즐거움을 읽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소년시절에는 지식을 향한 동경과 환희만큼이나 깊은 슬픔이 배여 있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p.81)

재일조선인 2세, 이 단어가 우리에게 안기는 복잡한 심사는 곧 그가 '타고 난' 불행을 뜻한다. 섬세하고 여린 심성의 소년 서경식은 자신이 친구들과 다른 존재임을 점차 분명하고 처절하게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한국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는 두 형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가까운 세월을 감방에서 보낸 서준식과 서승이 바로 그의 두 형이다. 그래서 그의 성장기(記)는 '소년의 미소' 혹은 '소년의 기쁨'이 아니라 '소년의 눈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경식의 에세이 <소년의 눈물>은 데라다 도라히코에서부터 프란츠 파농에 이르기까지, 그가 소년 시절의 대략 10년 동안 읽어왔던 책들을 다시 펼쳐보며 자신의 성장통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서경식은 보통의 사내아이들과 달리 야구시합의 주전에 뽑히는 것보다, 친척 어른들 사이에서 재롱을 떠는 일보다 다락방 한 구석에서 책장 넘기는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는 형들이 꽂아놓은 책들을 하나하나 뽑아 보며 이야기의 세계로 푹 빠져드는 기분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인물과 마주했을 때, 마음속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덜컹거림에 가볍게 떨기도 했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책 속의 세상에서, 거친 세상에 상처받았던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는 체육시간보다는 지식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때 마음의 평화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만큼의 독서 편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방안에 웅크린 채 책장을 넘기는 아이를 떠올리며 나 역시도 어떤 안도감 같은 걸 느꼈다. 서경식이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보았던 일치감과도 비슷한 느낌.

남다른 기호와 성격을 가졌던 소년은 자신이 그 이상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막연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름이 야구시합을 피하는 것처럼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앞으로의 삶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많은 상처를 내게 될 거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갔다. 그래서 그는,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학한 날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이들 무리와 나는 다르다’, ‘이들에게 결코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겠다’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p.114)

즐거움과 평온을 위한 것이었던 그의 독서는 감옥에서 보내온 형의 편지를 읽으면서 '의무'라는 또 하나의 길을 트게 된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自己硏鑽)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p.146)

이제 독서는 연약한 그가 펜 하나로 세상의 모순과 싸워나가기 위한 무기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잡던 손이 빼곡히 적힌 '읽어야 할 도서목록' 위에 놓일 때, 그 손의 주인은 이미 어른이 된 것이다. 가장 사적이고, 그 어느 순간보다도 주체적인 독서의 시간에마저 ‘의무’를 의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성장은 곧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른의 독서에는 언제나 얄팍한 수준이나마 그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와 그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경건함이 뒤따라야 한다. 나 역시도 서경식의 이 작은 에세이를, 안식을 위한 독서에서 책을 만드는 이 혹은 2005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로서의 어떤 의무를 상기시키는 독서로 살며시 옮겨놓으며 소소한 경건함을 품어본다.

초등학교 때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아마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쯤, 엄마와 아파트 상가의 도서대여점을 수시로 드나들며 세계명작 문고본들을 빌려보던 때 시작되었던 것 같다. 쉽지 않았을 책들을 참 많이도 읽었는데, 대부분은 희미한 인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 때도 지금처럼 책을 읽는 족족 이렇게 끄적이는 습관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손때 묻은 옛 책들을 뒤적이는 서경식의 섬세한 감성을 대하며, 설사 그 유치함이 부끄러워 몇 장 넘기지 못할지라도 그 시절의 비밀노트를 한번 꺼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겐 무거운 통증을 동반하는 성장사(史)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 비슷한 감상을 적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의 유년시절에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희망과 절망이 수놓아져 있는 법이니 말이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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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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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은 사십일 년간의 침묵을 통해 지난 날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배신에 대한, 크게는 인간의 삶과 본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얻어냅니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부에 이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깨달음들을, 그는 노년의 평온함과 시간의 무게 속에 감추어온 격렬한 감정 사이를 오가며 쉬지않고 토해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콘라드에게 어떠한 대답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콘라드는 이미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헨릭이 원하던 대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헨릭의 말처럼,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방법은 바로 그의 삶, 그의 전 생애를 살아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던, 입으로 무슨 말을 하던 참다운 나는 내 삶 안에 있는 것이겠죠.

헨릭은 인간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명예와 신의, 스스로에게 주어진 조건과 상황, 밖으로 보이는 모습 등을 중시하는 헨릭의 인간과 예술과 열정,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강렬한 목소리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콘라드와 크리스티나의 인간...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말은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도 각각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잃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 모두는 그 양 극단의 사이에서 어느 쪽에든 보다 가까운 자리에 서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멋드러진 말로 감추려 해도 결국엔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내려질 선택들이 우리의 자리를 뚜렷이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왠지 모를 두려움과 체념에 휩싸였습니다. 그렇지, 나는 결국엔 이런 인간이지...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세상을 들썩들썩하게 하는 새로운 주장과 신념들에, 문학과 예술이 말하는 이상적인 삶의 태도와 유형들에 감탄하고, 따라 외치고, 그에 충실한 듯 행동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금까지의 나 자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선택을 내리는 자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죽음을 앞둔 헨릭 혹은 마라이가 일깨워주듯,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각자의 삶의 방식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과감함을 보일 만한 의지가 스스로에게 부족한 탓이겠지요.

설사 제가 헨릭의 인간에 속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헨릭이 그랬듯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을 단 한번이라도 느껴볼 수 있다면 이 삶에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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