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 인생 하류 인생 - 위기의 중산층을 위한 자산 만들기 프로젝트
김의경 지음 / 갈매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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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며 연봉이 한참 낮은 직장으로 옮겨간 케이스다.

조금 덜 벌고 덜 쓰되, 조금 더 만족스럽고 여유롭게 살자는 생각으로.

후회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월급날이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날이면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리다.

나 같은 사람들을 다운시프트족이라고 하던가?

어쨌거나 이런 사람들일수록 재테크는 필수다.

적게 벌기로 한 만큼 수중에 들어온 돈을 제대로 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무런 경제 관념이 없던 나도 직장을 옮기면서 재테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이 책 <상류 인생 하류 인생>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너무 선정적인 제목이 아닌가 싶었지만,

읽다 보니 저절로 위기 의식이 느껴져  저자가 일러준 지침을 당장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흐리멍텅한 경제 관념에 제대로 와서 꽃힌 내용은 다음의 몇 가지다.

ㅇ 자산을 만들어라. 그래야 돈이 돈을 낳는다.

ㅇ 앞으로의 10년이 마지막 기회다.

ㅇ 지금 당장, 과감하게 시작하라.

ㅇ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자식은 하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는 이런 경고의 메시지가 구체적인 데이터와 친숙한 예화, 실천 가능한 방법과 함께 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곧장 행동에 옮겨야겠다고 마음 먹게 하는 힘이 있다.   

저자가 강조했듯, 빠른 시작이 더 큰 부를 낳는다.

단 하루의 차이가 10년 후, 20년 후에는 엄청난 차이가 될 수도 있다.

내일 당장 은행으로 가서 이 책의 안내에 따라 차근차근 자산 만들기를 시작할 생각이다.

종종 쓰려오던 가슴을 달래줄 훌륭한 멘토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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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의 중국신화 이야기 - 우주거인 반고에서 전쟁영웅 치우까지
김선자 지음 / 아카넷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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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아주 먼 옛날부터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설명하려 해왔다.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은 탄생과 죽음, 노화, 불치병, 진화 등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모든 의문들을 결국에는 풀어내고 말 것이라는 현대과학의 원대한 포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고대에는 모든 현상의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 광활한 대지 위에서 맨 몸뚱이 하나로 모든 자연현상을 맞아들여야 했던 인간은 바로 '신화'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이러한 의문들을 하나씩 해결해갔다. 하늘과 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간은 누가 만들었을까 등 창세와 관련한 거대한 의문에서부터 홍수나 가뭄은 왜 발생할까, 단풍잎은 왜 빨간색일까, 중국은 왜 서고동저의 지형을 갖게 되었을까, 하늘에는 왜 태양이 하나밖에 없을까 등 일상에서 관찰되는 소소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놓아두는 법이 없다. 마치 고대인들은 이러한 의문에 답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지어내느라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 같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각 주제에 대한 단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가 신들의 족보 안으로 수렴되어 일정한 체계를 갖는다. 간혹 모순이 되거나 생뚱맞은 이야기들도 있지만 대강 하나의 계보도로 정리해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빠삭하게 꿰고 있지를 못해서 섣불리 비교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중국 신화에서는 이 세상의 존재 자체에는 물음표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 의해 이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하늘과 땅, 산과 바다는 또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이 세상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는 그 이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늘과 땅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왜 어떤 땅은 높이 솟아올라 산이 되었는지, 바다는 왜 마르지 않는지... 또, 신들은 죽음을 맞이해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복숭아나무든 단풍나무든 자연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남는다. 이는 어쩌면 세상 만물은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영원한 자연의 일부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신화를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아직도 신화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이 '황당무계한' 신화들을 자꾸만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원래는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 중 중앙을 다스리던 천제에 불과했던 황제(黃帝)를 한족의 시조로 받들고, 북방을 다스렸던 신 전욱의 후예들이 한반도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식의 주장을 내세운다. 먼 옛날에도 그랬다. 한나라 때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흙으로 사람을 빚고, 홍수를 다스리고, 하늘을 고운 빛깔로 물들여주던 여신 여와가 남신 복희의 아내가 되고, 당나라 때에 이르면 그 둘이 남매가 된다. 고대 문헌에서는 이 둘이 함께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여와의 역할은 점차 축소된다. 또, 소수민족의 신인 반호를 슬그머니 한족의 신 반고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신화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방식을 보면 소수민족들의 다양한 문화를 '중화'라는 개념 속으로 흡수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즉 현재의 필요에 맞게 고대의 신화를 자유자재로 변형해 역사의 일부로 삼는 것이다.

신화의 역사화를 꾀하는 이들을 잠시 잊는다면, 중국 신화는 우리를 광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한다. 고대인들이 세상에 대해 품었던 의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태고의 자연환경과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탁 트인 공간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을 그들이 한없이 부럽고, 여전히 그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서사를 전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또 한없이 초라하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비록 이성의 시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풀지 못한 많은 의문들을 안고 있다. 이런 의문들을 풀어가기 위해 과학에 매진하는 한편, 그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상상의 공간도 함께 마련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 안타깝게도 요즘 되살아나고 있는 신화들의 열에 아홉은 '컨텐츠'라는 모호한 개념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얄팍하고 퍽퍽한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 의문들을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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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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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폐달을 밟으며 땅과 사람의 생김새를 온몸으로 느끼던 작가 김훈이 이번엔 개의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책을 덮고 매일 밤 자전거에 올라 밤 공기를 가르던 난, 이번엔 주변의 개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저들도 보리처럼 말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세상살이를 배워가고 있을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개로 사는 법'을 혼자 깨우쳐가고 있을까? 외롭겠구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로.

세상은 그렇게 말 없이, 덩그러니 주어지지만 삶의 진리는 그렇지 않다. 그런 건 없다. 보리는 보리대로 자기 땅을 밟고, 옆집에서 짖어대는 개는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자리를 찾는다. 나 역시도 뜻하지 않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니까, 살 길을 찾는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질책을 해도, 너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한껏 추켜세워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세상은 살아야 하는 거고,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보리가 그러지 않았나.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보리와 달리 난 가끔은 내가 배워 익힌 게 아닌, 남들이 말하는 '진리'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것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사람이니까.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이니까. 

문득, 어렸을 적 우리 집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개들이 떠오른다. 쇠줄에 묶인 채 세상을 배우던 그들이, 혹시 내가 건넨 그 수많은 말들을 모두 알아들은 건 아닐까? 혹시 나에게 뭔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던 건 아닐까?   

슬퍼서,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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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 중세 천년의 침묵을 깨는 소리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6
R.W.B. 루이스 지음, 윤희기 옮김 / 푸른숲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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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읽다 보면 피렌체의 시성 단테에 대한 언급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 인상적인 문장들을 종합해보면, 단테는 중세와 근세 혹은 근대를 명확히 가르는 하나의 이정표이자,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이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길래 이 위대한 역사가가 이 정도의 평가를 했던 것일까. 오래 전부터 이 매혹적인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마음속에 자리잡았지만, 불멸의 고전이라는 <신곡>에는 감히 손이 가지 않았다. 그 방대한 양에도 기가 죽었고,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의 집대성이라는 작품을 소화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쉬워만 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일단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눈에 확 들어오는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또 표지에 적혀 있는 "<새로운 인생>에서 <단테>에 이르기까지, 문학적인 전기란 바로 이런 것"이란 문장에 마음이 동했다. 단테를 읽는 동시에, 그동안 겁내기만 했던 <신곡>까지 덤으로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단테야말로 처음으로 나타난 완전한 의미에서의 예술가였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다룰 때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과 사랑과 좌절을 저본으로 삼은 작가였다. 신이 정해준 질서로 꽉 짜인 중세의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탐구의 의지를 보인 단테에게서 영혼을 바쳐 자아를 구현했던 예술가의 초상, 그 첫번째 초상을 볼 수 있었다.

문학적인 전기라는 표현대로,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테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담은 <새로운 인생>이나 인생의 중반에서 그때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쓴 <신곡>처럼 모든 작품에서 자전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은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단테의 모든 저작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죽 짚어본 느낌이다. 그리고 이제는 용기를 내어 <신곡>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단테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고, 뒤이어 이렇게 평전까지 출간되었다. 서양사에서의 그 중요한 입지에 비해, 우리에게는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는 이  인물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우리는 왜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서 그에 대한 제법 명쾌한 답을 볼 수 있기에 여기 옮겨 놓는다.

"끝으로, 새삼 '왜 단테인가?'라는 물음이 가능한 것은, 그가 비록 당시 피렌체 사람들을 겨냥하여 그들의 삶의 조건을 추적하고 기록했지만 그의 그러한 행보는 오늘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아니 이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 진정한 자유인을 향한 단테의 꿈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하기 때문이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영원히 천상의 영역에 묻어두어야 하는 우리 인간의 안타까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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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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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얼마 전에 읽었던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이 우리 나라에서 낸 첫 에세이다. 초판 발행일은 1992년 4월 30일. 이렇게 곧장 또 한 권의 책을 읽은 걸 보니, 내가 그에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그 '반함'에는 외모에 대한 나름의 추측도 포함되었던지, 표지의 앞날개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둥그런 얼굴에 뿔테 안경, 그 뒤에서 무엇인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두 눈, 꽉 다문 입술, 둔중한 느낌의 코... 섬세한 언어를 구사하는 여린 감성의 에세이스트답지 않게 그는 무척이나 단단한 표정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 마음대로 그가 길쭉한 손가락을 가진, 야리야리한 샌님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긴, 그 여린 감성에 무너져내리지 않고 이처럼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일이 어지간한 '단단함'으로 가능하기나 했을까.

<소년의 눈물>이 그가 어려서부터 읽어왔던 책들을 통해 그 특유의 감수성과 식민지배와 분단이 남긴 슬픈 가족사를 드러내 보였다면, 이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는 그가 서양의 백여 개의 미술관, 박물관, 성당 등에서 만났던 그림들이 책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의 순례기를 읽고 있자면, 그림을 나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는 객관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역사와 감정의 맥락에서 자리를 움직이고, 부름에 답하고, 또 나를 부르는 지극히 사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림 독법은 미술사나 미학 이론과 같은 외부의 요소들보다는 자신을 그 먼 유럽의 미술관에까지 가게 한 천형(天刑)과도 같은 의무감과 부채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으스스한 사해(死骸)의 취미를 가졌던 15세기 화가들의 세계관이나 17세기 정물화나 초상화 등에서 나타난 극사실주의의 경향 등 미술사적인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도 모두 그의 맥락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의 맥락이란, 이번에도 역시 두 형을 20년 가까이 차가운 감방 속에 있게 한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 견고한 독선을 말하는 것이다. 순수한, 그리고 어쩌면 무모한 열정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던 두 형이 감방 안에서 젊음을 다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옥바라지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갔고, 그와 누이는 두 사람의 석방을 위해 마찬가지로 젊음을 다 바쳤다. 말하자면, 그들 가족 모두는 역사가 빚어낸 비극에 전 생애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일본인이오?"라는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 단호함은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1990년 2월의 어느 날, 저자는 나폴레옹 군에 대한 스페인의 독립전쟁을 묘사한 고야의 판화집 '전쟁의 참화' 중에서 <1808년 5월 3일, 쁘린씨뻬 삐오 언덕의 총살>의 복제품을 사들고 서울의 공항을 들어선다. 그는 그 그림에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던 한국의 세관원들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국 정부의 폭력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과 학살에 대한 분노를 담은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의 프랑꼬 군사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바스끄의 작은 도시 게르니까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 일에 분노한 피카소의 '게르니까'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앞에서 1980년의 광주를 떠올린 그는 왜 우리 민족은 숱한 굴욕과 수탈과 살육을 겪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게르니까'를 탄생시키지 못했는가를 묻는다.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아직 가볍단 말인가."

책을 읽는 중에 느끼는 감정들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는 언어를 내가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경식의 산문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조심스럽게 읽힌다. 혹시 부스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그 저항의 속살을 한 겹 한 겹 벗겨낸다. 다독의 욕심에 휘리릭 읽어버렸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글이다. 고난에 찬 그의 삶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자신이 감내해야 할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를 위해 고투를 벌이던 고흐에게, 그에서 오는 모든 힘겨움을 참고 견뎌주던 아우 테오가 있었듯, 서준식과 서승에게는 서경식이라는 아우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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