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의 중국신화 이야기 - 우주거인 반고에서 전쟁영웅 치우까지
김선자 지음 / 아카넷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아주 먼 옛날부터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설명하려 해왔다.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은 탄생과 죽음, 노화, 불치병, 진화 등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모든 의문들을 결국에는 풀어내고 말 것이라는 현대과학의 원대한 포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고대에는 모든 현상의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을까? 광활한 대지 위에서 맨 몸뚱이 하나로 모든 자연현상을 맞아들여야 했던 인간은 바로 '신화'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이러한 의문들을 하나씩 해결해갔다. 하늘과 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간은 누가 만들었을까 등 창세와 관련한 거대한 의문에서부터 홍수나 가뭄은 왜 발생할까, 단풍잎은 왜 빨간색일까, 중국은 왜 서고동저의 지형을 갖게 되었을까, 하늘에는 왜 태양이 하나밖에 없을까 등 일상에서 관찰되는 소소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놓아두는 법이 없다. 마치 고대인들은 이러한 의문에 답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지어내느라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 같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각 주제에 대한 단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가 신들의 족보 안으로 수렴되어 일정한 체계를 갖는다. 간혹 모순이 되거나 생뚱맞은 이야기들도 있지만 대강 하나의 계보도로 정리해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빠삭하게 꿰고 있지를 못해서 섣불리 비교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중국 신화에서는 이 세상의 존재 자체에는 물음표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 의해 이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하늘과 땅, 산과 바다는 또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이 세상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는 그 이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늘과 땅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왜 어떤 땅은 높이 솟아올라 산이 되었는지, 바다는 왜 마르지 않는지... 또, 신들은 죽음을 맞이해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복숭아나무든 단풍나무든 자연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남는다. 이는 어쩌면 세상 만물은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영원한 자연의 일부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신화를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아직도 신화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이 '황당무계한' 신화들을 자꾸만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원래는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 중 중앙을 다스리던 천제에 불과했던 황제(黃帝)를 한족의 시조로 받들고, 북방을 다스렸던 신 전욱의 후예들이 한반도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식의 주장을 내세운다. 먼 옛날에도 그랬다. 한나라 때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흙으로 사람을 빚고, 홍수를 다스리고, 하늘을 고운 빛깔로 물들여주던 여신 여와가 남신 복희의 아내가 되고, 당나라 때에 이르면 그 둘이 남매가 된다. 고대 문헌에서는 이 둘이 함께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여와의 역할은 점차 축소된다. 또, 소수민족의 신인 반호를 슬그머니 한족의 신 반고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신화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방식을 보면 소수민족들의 다양한 문화를 '중화'라는 개념 속으로 흡수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즉 현재의 필요에 맞게 고대의 신화를 자유자재로 변형해 역사의 일부로 삼는 것이다.

신화의 역사화를 꾀하는 이들을 잠시 잊는다면, 중국 신화는 우리를 광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한다. 고대인들이 세상에 대해 품었던 의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태고의 자연환경과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탁 트인 공간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을 그들이 한없이 부럽고, 여전히 그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서사를 전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또 한없이 초라하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비록 이성의 시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풀지 못한 많은 의문들을 안고 있다. 이런 의문들을 풀어가기 위해 과학에 매진하는 한편, 그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상상의 공간도 함께 마련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 안타깝게도 요즘 되살아나고 있는 신화들의 열에 아홉은 '컨텐츠'라는 모호한 개념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얄팍하고 퍽퍽한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 의문들을 해결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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