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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트랜스필 총서 3
최유미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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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2021)에서 기훈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밟고 올라서면서도 상우가 그 죽음을 당연시할 때 분노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구태여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는 나와 상대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걸 아는 게임에서 일남을 속이다가 정작 그 사실을 들키자 죄책감에 눈물 짓기도 한다. 기훈의 이런 행동들은 일견 위선적으로 보인다. 이 게임에서 죽고 죽이는 것은 절대 규칙이다. 모두 살리기를 이룰 방법은 없다. 단지 죽음을 매개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상우에게 경쟁자들의 죽음은 승리의 도구일 뿐이지만 기훈에게 그것은 우정을 확인하는 방식이고 내 삶의 무게를 더하는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길고양이가 살면 그만큼의 야생 새들이 사냥당해 죽는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죽이지 말라"라는 제1계율은 실천될 수 없다. 무엇도 죽이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그래서 레비나스를 비판한다. "죽이지 말라"라는 계율은 죽여도 되는 생명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생명의 암묵적 구별을 은폐하고, "죽여도 되는" 범주에 속한 생명에게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실천은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이다. 죽음이 죄임을 깊이 인정하고, 죽임의 책임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죽음과 죽임의 관계망 속에서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을 반성적으로 실천한다. 그런 점에서 기훈의 승리는 순전한 권선징악만이 아니라 관계성의 윤리의 승리이다. 해러웨이는 이 윤리가 비인간에게까지 작동될 것을 요청한다. '나'는 오롯이 나가 아니고 수많은 장내 미생물이며 이들은 박테리아의 공생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 공생은 아름답지 않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소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위협하면서 이루어지고 유지되었다. 나는 내가 먹는 닭에게 의존하고 닭은 모이를 주는 사람에게 의존하지만 그 관계는 평등한 것이 아니다. 상호 의존한다는 것은 안정화된 자리에서 손을 꼭 맞잡는 게 아니라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오가며 상대가 준 실뜨기의 패턴을 받고 내가 만든 패턴을 되돌려 주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타자와 이런 실뜨기를 한다. 하지만 무엇과 연결되고 무엇과 단절될지 필연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 응답할 수는 없으니까. 그 지점에서 윤리가 발생한다.


나는 주위의 타자들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적절히 응답하고 있는가? 타자의 고통을 나눌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나의 지식이 어디에서 왜 무엇을 봄으로써 얻어진 지식인지, 내 앎의 객관성이 담보하는 부분성과 국지성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성찰하고 있는가?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우리의 모든 지식과 관계가 국지적이라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상기시키지만 소개되는 사유의 구체성과 깊이는 결코 작지 않다. 페미니즘 생태학과 과학기술학의 접합을 통해 새로운 생각의 지평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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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입문
카타르지나 드 라자리-라덱.피터 싱어 지음, 류지한 옮김 / 울력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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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쟁점, 간명한 논증, 직관적인 구성. 입문서에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었고, 고전적 공리주의에 결과주의 진영 내부의 반론을 거쳐 다시 원래의 입장으로 되돌아오는 3장이 특히 흥미롭다. 저자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주장이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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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목격자들 : 철새·경락·자폐증·성형의 현장에 연루되다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4
김연화 외 지음 / 에디토리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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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학 분야의 낯섦과 대중서의 성격을 감안해야겠으나, 메시지와 기술지를 촘촘히 엮어내기보다 메시지를 의욕적으로 앞세운 듯한 만듦새가 아쉽다. 연구자의 성찰성을 의식한 자기진술과 몸의 경험에 대한 반복적 강조는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임소연의 성형 수술을 보는 관점, 라투르를 인용한 '과학기술의 블랙박스화' 문제제기는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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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입문 창비신서 74
테리 이글턴 지음, 김명환, 장남수, 정남영 옮김 / 창비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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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의 많은 문학이론서가 최신 경향의 반영과 중립적 스탠스를 표방하며 구매욕을 자극하고 있으나, 로이스 타이슨의 실전적 지침서인 『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제외하면 이글턴의 책만큼 친절한 입문서는 찾기 어렵다. 명료한 쟁점, 일관된 평가 기준, 위악적이고 신랄한 문체로 방대한 이론사를 장악하는 본편과 더불어 저자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케 하는 역자 해설까지 알찬 구성의 책이다. 인문학 지식이 전무한 독자에겐 다소 어렵겠지만, 문학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갈 법한 현재적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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