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종석, “고종석의 한국어산책: 말들의 풍경”, 개마고원, 2007(2008.9.24)

읽어 나가던 책들의 보유목록이 끊겨 책꽂이를 둘러 보다가 다시 집어든 책이다. 드물게 두 번 읽는 경우인데 막상 목차를 둘러 보니 몇 개를 빼고는 모두 처음 접하는 제목들인 듯하다. 머리에 축적된 지식으로 남기지 못하고 단순히 일독했다는 뿌듯함 자체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소제목이 와닿는 일부분만을 전철 안에서 다시 읽는다. 다음의 순서로.
1.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2. 화사한, 너무나 화사한_정운영의 경제평론
3. 임재경, 마지막 지식인 기자
4. 나는 ‘쓰다’의 주어다_김윤식 서문집
5.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6. 한자 단상_그 유혹적인, 치명적인 매력과 마력
7.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첫째 글은 김현의 글쓰기가 (그의 전부인지 아니면 그의 일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종석의 글쓰기의 모태이자 이상향이라는 점을, 정운영의 화사한 글쓰기는 어쩌면 화려함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적 사치일 수도 있다는 점을, 셋째, 한글이 음소문자이자 소리글자로서 세계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문자학적 호사”를 누리는 글자라는 점을 알려 준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최고 다작 작가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고 스스로 자조하는(!) 책의 서문만으로 또다른 책한권을 만들어 내는 김윤식보다 더 다작의 작가가 고은과 강준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가 김정환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책을 읽도록 유혹하는 치명적 표현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지만 아무나 쉽게 골라내지는 못할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서남사람인 고종석은 이렇게 골랐다.(pp.144-149)

하나, 가시내. .... ‘가시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입힌 이로 서남 출신의 시인 서정주가 있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입마춤). 내게도 가시내라는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감있게 말할 줄 알던 형이 있었다.
둘, 서리서리. 황진이의 시에서 사랑의 부사로 나오는 단어로 놀라운 상상력으로 시간을 공간으로, 물질로 바꿔놓는 표현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셋, 그리움.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적 효과다. .. 모든 사랑의 시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서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넷, 저절로. ‘저절로’는 애씀이나 집착을 넘어선, 마음과 몸의 가장 높은 단계이기도 하다. 인위와 자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 ‘저절로’의 매력 또는 마력이다.
다섯, 설레다. 설렘은 마음의 나풀거림이다. 설렘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여섯, 짠하다. 서남 사람들이 말하는 ‘짠하다’는 표준어 ‘안쓰럽다’와 뜻이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는 것 같다. “짠하다”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있다. ‘짠하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형용사다.
일곱, 아내. ‘아내’라는 말이 내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테다.
여덟, 가을. 가을(가을걷이, 추수, fall)은 결실의 계절인 동시에 조락의 계절이기도 하다.
아홉, 넋. 넋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 그러나 넋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얼마나 납작할 것인가.
열,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으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글을 술한잔 걸친 한밤에 쓴 글이었던지 후기에서는 ‘술’을 빼고 ‘그윽하다’를 보태고자 한다.)

한편 1960년대의 시인 김수영의 경우 「가장 아름다운 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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