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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나를 그린다
도가미 히로마사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3월
평점 :
절판
"뭐라도 되면 좋겠지만, 아무것도 못 될지도 모르죠."
"뭐가 되는 게 아니라 무언가로 변해가는 걸지도 모르겠네."
모든 것에서 회피하고 단절된 상태의 학생과 모든 것에서 인연과 관계를 이해하는 선생의 문답. 도가미 히로마사(砥上裕將)의 <선은 나를 그린다(線は,僕を描く)>에서 주인공 아오야마가 전시회 준비를 돕다 만난 수묵화가 니시하마와 나누는 대화 일부다.

아오야마는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후 '아무것도' 아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우물쭈물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그의 의지는 아무 곳에도 없다. 스스로 하얀 벽에 갇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낸다. 대학에 와서야 본의아니게 어설픈 '관계' 속에 자리하게 됐지만.
<선은 나를 그린다>는 아오야마가 수묵화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지어지는 까닭을 이야기한다. 수묵화가 아니라 그림 자체와도 전혀 관계없었던 아오야마가 전시회를 통해 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을 만나고, 특이한 자신의 경험-쭉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갇혀 새하애진 경험-에서 기인한 재능을 발견하면서 수묵화의 세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다.

"재능은 말이지, 이 연기 같은 겨야. 알아차리고 보면 아주 자연스레 그곳에 있고, 호흡하고 있는 법이지. 재능이란 건 평소에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 속에 있는 법이야."
고작 담배를 연거푸 피우면서 던지는 니시하마의 말이지만, 아오야마에게는 묘한 울림으로 남게 된다. 사실 그때까지 아오야마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 명확함 뿐이었다.
본의아니게 수묵화의 거장의 애제자가 된 아오야마. 거장의 손녀 지아키와의 대립, 이해, 갈등, 의지 등 다양한 감정을 분출해내며 '관계'를 형성해간다. 소설 속 '고잔상'이라는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지만 각자가 품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극복해내는 여정을 함께 이어간다.
<선은 나를 그린다>는 특히 수묵화가 갖고 있는 매력에 대해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 한 가지 색으로 그려진 그림 안에 다양한 농담으로 표현한 먹이 있고, 그것이 색채보다도 더 생생한 색감을 느끼게 하는 멋을 설명한다.


"수묵은 먹의 농담(濃淡), 윤갈(潤渴), 비수(肥瘦), 계조(階調)로 삼라만상을 그려내기 위해 도전하는 일"이라는 거장의 말은 실제 수묵화가인 작가의 정의가 담겨 있으리라.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에 갇혀 있던 아오야마가 '유대감과 함께 그린다'는 진리를 이해하기까지 책은 인내심을 갖고 서서히 풀어 낸다. 자연과의 유대감을 응시하고, 배우고, 그 안에서 끊기 힘든 인연을 맺고 있는 자신을 느껴가는 청춘이 그림 그려지듯 모습을 드러낸다.
<선은 나를 그린다>. 마치 한 구절 싯구와도 같은 제목 그대로 담담하고도 심오한 청춘의 내면이 그려 진다. 역자는 그것을 '여백'과 '공백'이라는 단어의 차이로 설명했다. 어설프게 비워져 있는 공백을 의미있는 공간인 여백으로 바꿔내는 인생의 수묵화처럼 말이다.(*)
* 리뷰어스 클럽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