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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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22일 오후 3시를 살짝 넘긴 시각, 35세의 '잘나가는' 건축가 로버트 메이틀랜드는 런던 중심부 웨스트웨이 입체교차로를 달리고 있다. 과속을 직감한 순간 타고 있던 재규어의 왼쪽 앞바퀴가 파열되고, 차는 가드레일을 넘어 굴러 떨어져 작은 교통섬에 불시착한다.


세 갈래의 고속도로가 교차되어 지나가는 사이에 놓인 교통섬. 황무지인 그곳에 저절로 생겨난 약 200미터 길이의 삼각형 형태의 땅 조각에 메이틀랜드는 갇히게 된다. 금방 구조될 것이라는 기대는 힘들게 경사면을 타고 올라간 도로 위에서 다시 한 번 뺑소니 사고를 당하면서 날아가 버리고, 쌩쌩 달리는 차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J.G. 밸러드의 <콘크리트의 섬>. 도심 한 가운데 고립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얼핏 구조의 방법이 쉬울 듯 여겨지지만 사정은 그리 녹녹치 않다. 온 몸의 상처, 부러진 다리, 특히 메이틀랜드를 조난자로 전혀 인식해주지 않는 도로 위의 사람들. 바로 눈 앞에 사람과 문명이 있지만, 바로 그 존재가 그를 <콘크리트의 섬>에 갇히게 한다. 


도심 안 섬에 갇힌 메이틀랜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각을 얻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신이 있든 없든 질문을 던지지 않도록 훈련된 직원들, 아내나 외도 상대까지 '사라진 그'에게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절한 구조 신호를 발견한 도로 위 운전자는 그에게 반갑게 손 흔들며 인사하고, 경찰을 불러달라는 몸짓에는 클랙슨과 위협운전으로 응수한다.


머지않아 지나가던 운전자나 경찰이 사고가 난 그의 자동차를 발견할 것이고, 교외의 양방향 도로 가운데의 보호구역에 추락한 사람을 구할 때처럼 순식간에 구조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가정이 완벽한 거짓이라는 점이 명확해진 메이틀랜드. 이제 그에게는 탈출보다 생존에 대한 의지가 더욱 절실해진다. 이 섬을 정복하고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다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린다.


"나는 섬이로다."


모든 책무를 자신에게서 고립된 이 섬으로 이양하며 그는 선언한다. 나는 섬이라고. 메이틀랜드 이전에 섬에 살고 있던 거주자-젊은 여성과 늙은 부랑자-를 만나면서 그는 희망, 절망, 기대, 원한, 복수, 경쟁, 대결의 구도를 이어가며 생존에 나선다.


<콘크리트의 섬>에서 십수년 전에 본 한국영화 <김씨 표류기>가 떠올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살을 감행한 주인공이 실패하고, 한강의 밤섬에 홀로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김씨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밤섬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간다. 떠밀려온 짜파게티 스프에 감동하는 장면이 강하게 남아 있다. 여성 히키코모리(引き籠り)의 등장으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 그런 스토리다. <콘크리트의 섬>에서 고립된 인간이 맞는 타인과의 조우는 기대와 위협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저자는 "고립되어 버리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폭군이 될 수도, 자기 강점과 약점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어쩌면 항상 외면해 왔던 자신의 내밀한 면모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어쩌면 원래부터 혼자였던 인간이 '콘크리트의 섬'에 떨어진 뒤에야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닌지. 도심 재난이란 것은 애초에 각자의 본연 속에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책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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