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행
호시노 도모유키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대단한 상상력이다. 일본 미니시리즈 '기묘한 이야기(世にも奇妙な物語)'보다 더욱 '기묘한' 단편이 이어진다. 호시노 도모유키(星野智幸) 스스로 '지금 인간 세상이 품고 있는 어두운 면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고 표현한 소설집 <인간은행>은 세상을 인정사정없이 뒤엎어버린듯한 느낌마저준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인간은행', '선배 전설' 등 11개의 단편은 노인, 환경, 빈부격차, 실업, 출산 등 지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상상마저 넘어선 현재를 그리고 있다.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표현이 과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다.



사람을 돈으로 계산해 인간 활동 자체를 화폐로 변환하는 시스템(인간은행), 노인 간병 문제를 '에코화'라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외면하는 사회(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녀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과 꽃이 융합한 새로운 인류(스킨 플랜트), 홍수로 침수된 반지하에 갇혀 스스로 흙과 동일한 존재로 변하는 인간(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 등 현실이 가진 경계를 완전히 무시한 스토리가 읽는이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 사람, 돈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돈입니다."


진카(人貨), 즉 인간 화폐. '인간은행'은 사람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돈이 되어 노동으로 대신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람으로 계산하는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주인공 간토는 '화폐'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부정하는 편이다. 가진 재산을 모조리 써버리고 소유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뒤 인간은행을 찾게 된다. 우연히 성공하게 된 옛 동료와의 동업으로 빌린 돈을 다 갚게 되지만, 여전히 '화폐'는 그에게 난해하다. 스스로 화폐가 되어 자유를 느끼는 후가 씨를 만나면서 인간화폐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배 전설'은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과 오버랩된다. 집을 소유한 사람보다 홈리스가 더욱 정당화되는 사회가 낯설지만 신기하게도 설득력마저 갖는다. '집부수기'라는 운동의 시초로 전설이 된 선배는 집이라는 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집을 지키기 위해 정말 무엇을 잃어가고 사는지' 깊은 고민을 던진다. 베드룸 로커라는 베개와 이불만 있는 거리의 시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그때는 2050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외친다. "꼭 길바닥으로 나와보십시오!"



이상기온으로 고통받는 일본. 사람들은 존재마저 혼돈한다. 단편 '핑크'는 연일 40도가 넘어서는 고온현상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정기능을 이야기한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연못을 보던 나오미는 신기한 모습을 본다. 연못으로 뛰어드는 새, 연못에서 날아오르는 물고기. 더위를 피해 물 속으로, 뜨거운 물을 피해 공중으로 향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집단 광기와도 같은 회오리춤이 희망으로 전해진다.


'스킨 플랜트'에서는 사람의 몸에 심은 씨앗이 자라 과일이 되고 채소가 된다. 멋내기 유행의 정도를 넘어 자신의 몸에서 생산한 작물을 섭취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자 사람들은 이제 꽃을 피워보길 원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꽃피우기지만 욕망은 누를 수가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꽃피우기는 성공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안게 된다. 바로 한 번 꽃을 피운 사람의 몸은 성적 기능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자칫 인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꽃피우기. 그러나 서서히 인간과 꽃이 하나로 동화하면서 씨를 뿌려 지구 어디에서건 열매와 같은 인간이 탄생한다.



이렇듯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은행>에 실린 이야기 하나하나는 실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일 수도,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지못하는 아득한 과거일 수도 있겠다. 그는 "등장인물들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인간계를 등진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보지 못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마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모미 쵸아요' 편은 작가가 실제 한국 방문에서 경험한 일을 쓴 수필과도 같다. 일본보다 더욱 빨리 변화하는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부러움이 전해진다. 길거리에서 여자한테 혼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진차 한구쿠나무자(진짜 한국남자)'로 비쳐진 작가. 그래서 "한국에서 배우고 에너지를 얻겠다"는 호시노 도모유키의 다짐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인간은행>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만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마음대로 그려보는 자유를 준다. 역자의 표현대로 '먼 별에서 날아온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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