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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ㅣ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평점 :
이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반열에 올라선 홉스봄이 수십년 간 각지에 기고한 에세이, 강연록 등을 모아 만든 책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의 탓일 수도 있고 번역의 탓일 수도 있는데, 책의 전반부 3분의 1 가량은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지점을 넘어서면 문장들이 비교적 쉽고 매끄럽게 풀어져 있어 한결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홉스봄은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학계에서 맹위를 떨치던 50~60년대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의 활약에 대하여 명백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80~90년대에 들어서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며 자신이 평생을 바쳐 옹호했던 체제의 실패에 고통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정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이제 낡은 것이 되었을지언정,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미래로 나아가는 지침일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홉스봄은 마르크스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후속 세대는 결코 마르크스에게 종속되지 않고 그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홉스봄이 지향하는 역사학은 종합적인 역사학이다. 그는 훌륭한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분야 학문들의 방법론과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학은 모든 인문사회과학들을 망라하는 종합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날 학파의 방식에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또한 미시사와 거시사의 대립을 부정하고, 둘을 각각 망원경과 현미경에 비유하면서 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은 기술적 선택의 문제일 뿐, 망원경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배척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그으며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내세우는 상대주의는 명백한 실재를 거부하며, 현실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재판 과정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 그리고 피고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벌어졌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증거 수집과 판단 과정이지, 포스트 모던적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홉스봄은 날카로운 안목으로 현 시대 야만성의 유래를 설명하고 20세기 시기 구분의 분절들을 짚어준다. 또한 그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임을 당당히 표방하면서도 냉전을 종교 전쟁에 비유하며 상대진영에 대한 맹목적 악마화를 비판한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균형 감각과 학문적 깊이는 분명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대가의 풍모라고 칭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