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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백남준 총서 1
백남준 지음 / 백남준아트센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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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백남준이 직접 쓴 책이 있다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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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백남준 총서 1
백남준 지음 / 백남준아트센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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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누구일까.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가 창시한 비디오 아트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그것이 백남준 예술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일까.  

백남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떠받치고 있는 문화와 사상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백남준은 미스터리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겠다면서 '음악의 전시'를 부르짖는가 하면, 몽골 같은 서구 바깥의 문화를 강조하는 식이다. 어떻게 보면, 좌충우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찬찬히 읽노라면, 그의 젊은 시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엿보인다.  

식민지 시절의 한국 땅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부유한 집의 자제였고, 일본과 독일 유학을 했다. 그래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그리고 한국 전쟁의 와중에 있었고, 그 전쟁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배후의 힘과 그런 전쟁의 세계를 종식할 새로운 힘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술로써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희망을 종종 피력한다. 백남준은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책에는 백남준이 직접 쓴 글들이 가득하다. 그동안 국내에 왜 이런 텍스트가 소개되지 않았는지 이상할 지경이다. 그만큼 그 글들은 톡톡 튀고 재미있다. 그는 서른 전후에 여러 편의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그 악보를 보노라면, 1984년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참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하고, 추진해온 예술가로서 기획자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계는 테크놀로지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따라 새롭게 재편된다. 이것이 백남준이 세계가 변모하는 흐름을 보는 기본적인 전제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계의 착한 추종자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기계를 부수기 위한 반대자가 되어야 할까. 백남준은 이러한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새로운 선택을 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한 사람이다.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기계에 굉장히 박식한 사람이었다. 1961년 TV로 실험할 때도 독학으로 했고, 1964년 로봇을 만들 때도 혼자 만들었다. 골동품을 갖고 만든 그의 작품에 유달리 고유하게 느껴지는 손맛은 기계에 박식한 장인의 손맛이다. 

이 책은 백남준에 대한 기존의 모든 상투적인 인상을 씻어버린다. 그만큼 백남준이 얼마나 놀라운 발상을 했고, 인문적이고 탈식민주의적으로 예술 활동을 펼쳤는가를 느끼게 한다. 나아가 그로부터 서구의 보편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보편주의를 갖고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백남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필독인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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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리커버)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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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의 각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나는 <천 개의 고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었다. 하나는 왜 색인이 없는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각주 속에 등장하는 책들을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고, 후자는 이제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서서히 외연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반갑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들뢰지안인가 하면 전혀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고봉을 이루는 책에 관한 한, 그 밑밥을 제대로 마련해두지 않으면 이해불가라는 판단이 덜미를 잡고 있다는 것뿐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의 대상이다. 클라스트르의 사유는 너무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사회적인 것의 움직임이 너무 스트레이트하게 파악되고, 인류학적 전거를 꿰어맞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류학서는 여러모로 매력적인데,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매력의 진원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로 말하면, 클라스트르가 마치 아르토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사유에 발동이 걸려서  되든 안되든 무모하리만큼 압도적으로 시도해보는 것이리라, 라고 받아들인다. 순진한 맛이 있는 책일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적인 가치에 도달하는데, 그 순진성이 시대의 변화에 빛바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학이란 학문은 이제 정치적 분화, 사회적 분화를 거쳐서 예술적 분화에까지 도달하고 있는데, 가까운 일본의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역시 클라스트르를 참조하고 있다. 그는 브뤼노 라투르의 대칭성 인류학 개념을 빌려와서 자기 멋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기류의 사유조차도 솔직히 매력적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유동적인 지혜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아우르는 거의 코스몰로지의 총체적인 설명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설파하면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 공동체 내부의 작동 방식이 파시즘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는 것을 들려준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그랬다는 것을, 클라스트르는 비서구의 문화적 삶의 양식에서 그랬다는 것을 나란히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 또 어떤 일파만파를 낳았는지, 그리고 칼 폴라니의 경제 인류학이 어떤 파급력으로 세계 이해를 도왔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사회학이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면, 사회는 비껴나가는 듯한 현황에서 인류학적 시선은 큰 도움이 된다. 시간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동시대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 설정조차 어려워진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정진의 <불교인류학> <종교인류학> 역시 같은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나 아닌 세계를 보았던 레비-스트로스의 탐구가 유동적 지혜의 대칭성, 즉 서구와 비서구를 잇는 무지개 다리를 놓는 광경을 뜯어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서구의 입장에서만 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우리는 너무 서구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서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거울 단계에서 빠져나오기가 참 힘들다는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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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 모든 이를 위한 책,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석현 옮김 / 야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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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자 백석현이 궁금하다. 그는 독학자로서 니체의 정수를 번역했기 때문이다. 대화 없는 독학자의 약점은 종종 객관성을 잃은 자의적인 깊이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석현의 번역은 그런 오류의 수렁에서 자유로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최상의 번역을 일궈냈다. 왜 이런 평가가 가능할까.

그것은 오랜 시간 지속해온 니체 독자로서 가능한 판단일 것이다. 니체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사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변용을 겪었던가. 숱한 에피고넨들이 기대었고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활용했다. 그러나 니체는 난숙해지지 않았고 지금 읽어도 여전히 젊고 팔팔한 정신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은 갈수록 니체를 읽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로서 영롱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그런데 니체의 정수는 무엇일까.

백석현이 이 대목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는 니체의 문체에서 단편이나 경구, 에세이보다 앞서는 것으로 시(詩)를 들고 있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시인이기도 했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통째로 시집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문체를 사용했던 니체에게서 다른 면모를 봤다면 좋았을 것이지만, 학술 진영에게 니체는 여전히 철학자인 것이다. 백석현은 이것이 심히 못마땅한 것이다. '시인도 겸한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도 겸한 시인이다.' 시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 사유와도 상통하는 법이다.

이런 발상에서 백석현이 번역한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가 빛난다. 이 번역본은 아마도 니체 번역으로서는 매우 혁신적이며 동시에 이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역설적인 면이야말로 니체의 정신에 보다 가까운 것이 아닐까. 관성적인 것과 공인된 것 사이에서 새롭게 생성되기를 바라는 번역이라면, 이런 형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백석현의 번역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는데, 아마 다른 니체 독자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석현의 번역은 시적 리듬, 음악적 리듬이 가득하다. 즉 묵독되어야 했던 텍스트(철학서)에서 음독해야만 참맛을 느끼는 선언서(시집)으로 다가갈 것이다.

이런 감상을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별난 취향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의 오리지널 독자라면, 동감할 것이다. 니체는 어쩌면 동기감응의 모델일 것이다. 즉 같은 기운은 감응한다.

세상에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여러 번역이 존재한다. 민음사의 정희창 번역본도 있지만, 문예출판사의 황문수 번역본과 청하출판사의 최승자 번역본이 차전놀이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세상의 니체 번역이 나오기 이전의 선택이다. (실은 책세상의 번역본은 검토할 여력이 없었다. ) 개인적으로는 "그대, 충일하는 천체여!" 라는 식의 의고적이고 장엄한 황문수 번역본을 선호했었다. 젊은 날의 희랍 취향이라고 할까.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니체의 이 문제작을 좀더 생기발랄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찾아들었다.

직절적이면서도 역설적인 어조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원어와의 근사 관계에만 관심이 쏠린 학술 번역을 포기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젊은 날 니체에게서 무엇인가를 나눠가진(혹은 나눠가졌다고 믿는) 이들에게 가끔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백석현은 이런 질문들에 응답하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참신한 번역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왜 세상은 이 번역본을 읽지 않는 것인가.

 

"증오로 죽이는 법 말고도 웃겨서 죽이는 법도 있어.

자, <중력의 영>을 웃겨서 죽여 보자고!

 

걷는 법을 배우자마자 나는 줄곧 뛰면서 살았지.

나는 나는[飛] 법도 배웠어.

나는 법을 배우자마자 누가 나를 더 이상 떼밀 필요가 없어졌어.

 

나는 경쾌하게 움직여.

나는 날지.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살지.

신이 하나, 내 속에서 춤추고 있거든.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106쪽)

 

"아, 시인들은 별별 것이 다 땅과 하늘 사이에 존재한다고 상상하지!"

 

아, 게다가 시인들은 별별 것이 다 하늘 위에 존재한다고 상상하지.

신들은 모두 시인이 만들어 낸 상징이고 궤변이야.

 

우리 시인의 상상은 계속 위로 올라간 거야. 구름 나라로.

거기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힌 인형들을 놓았지.

그리고 그것을 신이니 초인이니 부른 거야.

 

신이나 초인은 정말 한없이 가벼운 존재잖아?

구름 의자에도 앉을 수 있잖아?" (307쪽)

 

"인간은 모든 짐승의 장점을 빼앗아 죄다 자기 것으로 삼았지.

그 때문에 모든 짐승 중에 인간의 삶이 가장 고달픈 거야." (488쪽)

 

"한 번이라도 춤을 추지 않았던 날은 아예 없었던 날로 생각해야 돼!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 못했던 지혜는 모두 가짜 지혜!" (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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