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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리커버)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평점 :
이 책의 존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의 각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나는 <천 개의 고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었다. 하나는 왜 색인이 없는가 하는 것과 또 하나는 각주 속에 등장하는 책들을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고, 후자는 이제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서서히 외연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반갑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들뢰지안인가 하면 전혀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고봉을 이루는 책에 관한 한, 그 밑밥을 제대로 마련해두지 않으면 이해불가라는 판단이 덜미를 잡고 있다는 것뿐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의 대상이다. 클라스트르의 사유는 너무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사회적인 것의 움직임이 너무 스트레이트하게 파악되고, 인류학적 전거를 꿰어맞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류학서는 여러모로 매력적인데,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매력의 진원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로 말하면, 클라스트르가 마치 아르토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사유에 발동이 걸려서 되든 안되든 무모하리만큼 압도적으로 시도해보는 것이리라, 라고 받아들인다. 순진한 맛이 있는 책일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적인 가치에 도달하는데, 그 순진성이 시대의 변화에 빛바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학이란 학문은 이제 정치적 분화, 사회적 분화를 거쳐서 예술적 분화에까지 도달하고 있는데, 가까운 일본의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역시 클라스트르를 참조하고 있다. 그는 브뤼노 라투르의 대칭성 인류학 개념을 빌려와서 자기 멋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기류의 사유조차도 솔직히 매력적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유동적인 지혜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아우르는 거의 코스몰로지의 총체적인 설명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설파하면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 공동체 내부의 작동 방식이 파시즘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는 것을 들려준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그랬다는 것을, 클라스트르는 비서구의 문화적 삶의 양식에서 그랬다는 것을 나란히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 또 어떤 일파만파를 낳았는지, 그리고 칼 폴라니의 경제 인류학이 어떤 파급력으로 세계 이해를 도왔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사회학이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면, 사회는 비껴나가는 듯한 현황에서 인류학적 시선은 큰 도움이 된다. 시간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동시대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 설정조차 어려워진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정진의 <불교인류학> <종교인류학> 역시 같은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나 아닌 세계를 보았던 레비-스트로스의 탐구가 유동적 지혜의 대칭성, 즉 서구와 비서구를 잇는 무지개 다리를 놓는 광경을 뜯어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서구의 입장에서만 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우리는 너무 서구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서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거울 단계에서 빠져나오기가 참 힘들다는 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