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얼어붙듯 추운 것이 겨울의 책임이 아니듯,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는 것이 외투의 책임이 아니듯,

비록 외투 한 벌을 둘러싼 일이었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이렇게 적나라한 진실임을

원인과 결과를 향해 따질 수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원인과 결과의 굴레가 되어가는 것이 세월 탓은 아니었다.

일의 경과는 그랬다. 누구도 책임이 없었기에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었다.

 

『숨그네』「일의 경과」중에서


 

 

외투 한 벌을 둘러싼 일의 경과는 이렇습니다. 과거 법무사였던 파울 가스트는 배고픔을 어쩌지 못해 아내 하이드룬 가스트의 수프를 훔쳐 먹고 하이드룬 가스트는 끝내 죽게 됩니다. 여가수 로니 미히는 하이드룬 가스트가 입던 낡은 외투를 차지하게 되고, 법무사의 아내 하이드룬 가스트의 빈자리를 대신해 파울 가스트와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로니 미히가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거나 외투를 갖고 싶었다고 해서 그녀를 나무랄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얼어붙듯 추운 것이 겨울의 책임이 아니듯,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는 것이 외투의 책임이 아니듯 말이지요.

 

처음 『숨그네』를 읽어 내려가다가 헉, 하고 숨이 멎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채 두 쪽이 안 되며, 단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바로 이 장(章)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상황은 말 그대로 섬뜩했지만, 이 아름다운 문장 앞에서 헉, 하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아니, 어쩌면 이토록 섬뜩한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 이 문장들에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이런 반응이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르구요.

 

‘수용소’라는 극단의 상황은 선과 악이 구분되는 일반적인 ‘사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배고픔, 추위, 혹독한 노동 앞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게 됩니다. 삶과 죽음만이 공동의 관심사이자 공동의 목표가 된 ‘수용소 사회’에서 선악을 따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어쩌면 ‘선’을 따지는 것이야말로 ‘옳지 못한’ ‘악’이 되어버리는 거지요.『숨그네』는 이 지점에서 절대로 헐리우드식 장엄한 휴먼 드라마가 되지 않습니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독자의 눈물을 짜게 하거나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려내는 영웅적인 행동도 없습니다. 뮐러는 그럼으로써 결코 진실의 초점을 흐려놓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용소의 사람들을 ‘인간’이도록 만들었던 이성과 수많은 감정들은 마비되고, 그들 내면은 정신적 재난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탓이 아닙니다. 잘못된 시대와 역사 탓을, 그러므로 수용소의 어느 영웅이 바로잡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뮐러가 단 한 번도 사회운동가이기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뮐러는 언어와 문학에 사로잡힌 예술가였습니다. 특히 뮐러에게 언어란 어떤 힘을 행사했음이 분명합니다.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계 소수민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 히틀러의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뮐러의 부모 세대가 짊어져야 했던 부당한 죄과, 부조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의 흐름 속에서 뮐러에게 유일하게 명징하고 가치중립적이었던 것이 언어였을 것입니다. 뮐러가 어떤 이념(루마니아의 공산주의 혹은 히틀러의 나치즘)으로부터도 세뇌되지 않았으며, 혼란스런 시대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뮐러가 갈고 닦은 언어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스페셜북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에 실린 허수경, 강유일 선생님의 글, 특히 ‘낱말상자’에 대한 부분을 읽어보시면 뮐러의 언어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명징한 언어의 세계에 파묻혀 있었던 뮐러는 그런 시대와 상황 속에서 다른 선택은 할 수조차 없었을 겁니다. 독재에 반대하고, 독일로 망명하고, 『숨그네』처럼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그녀의 선택 말입니다. 그 선택은 뮐러의 ‘의지’이기 이전에, 그러지 않을 수 없는 뮐러 ‘자체’인 것이죠.

 

뮐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누가 보기에도 잔혹한 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뮐러의 손 안에서 이런 현실은, 어쩌다 차에 치인 동물의 잔해를 보듯, 두 번은 눈 뜨고 보고 싶지 않은 역겨운 경험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뮐러는 이 ‘불편한 진실’을 불편하기에 피하고만 싶게 만들지 않습니다. 분명 어느 독자는 뮐러를 두 번은 읽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문장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헤르타 뮐러의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문장들과 맞닥뜨릴 때 거의 본능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니, 느끼게 됩니다. 때로 현실은 비현실이 되고, 비현실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수용소에 없었던 이상, 수용소의 경험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수용소의 현실은 우리에게는 결코 현실로 다가올 수 없습니다. 뮐러는 그러한 현실을, 현실을 뛰어넘는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놓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비현실적인 언어를 통해서야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제대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그것이 어쩌면 뮐러의 예술가로서의 본능이자, 뮐러 문학의 절묘함이 아닐까요?

 

이 책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살고 사랑하며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진실’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헤르타 뮐러식 사랑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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