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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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이 버린 여인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먼저 주어. '조선'이라는 명사를 통해 호명된 '버리는'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국가권력? 남자?

그 다음은 목적어. 어떤 여인들이 버림을 받았을까. 권력의 주변부를 배회하던 여인들? 왕비? 양가의 규수? 그렇다면, 이 책은 도서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암투에 관한 또 다른 버전일 것. 웬만한 소재가 아닌 이상에 이런 식상한 책이 나왔을까. 그렇다면, 권력과 상관없이 지내는 평민이나 노비? 아님 기생? 그렇다면 희대의 섹스 스캔들로 희생된 여인들?

마지막, 동사. 과연 누군지 모를 그 여인들은 버림받을 짓을 했을까. 현대의 윤리기준으로 봤을 때도 버림받을 이유가 있었다면 책으로까지 묶여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역시 이성을 신봉하던 모던 사회였다는 내 소박한 생각에 따를 때, 지금의 에토스와는 양립할 수 없는 또다른 이성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마지막 의문에 들어서 난 책을 읽지도 않은 채, 그 이유가 가장 궁금해졌다. 왜 어떤 여인들은 어떤 주체로부터 버림을 받았을까. 도대체 왜?

명민한 독자라면 벌써부터 짐작했겠지만, 어떤 여인들을 버린 주체는 조선시대 남성 양반사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의 욕망이 스물스물 베어들어간 양반사회의 이성체계가 그 주범이다. 이것은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에 철저히 봉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反여성적이고, 反인간적인(현대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anti-humanistic한), 양반들의 건축물이다. (들뢰즈와 가따리를 따라) 이 '건축'이라는 용어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양반의 이성은 곧 국가였으며, 사회 윤리였고, 따라서 행위의 기준이자 규범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어 개인을 초월하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는 이것이 '강상윤리'라는 이름의 시스템으로 등장한다.

존 에프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군산복합체, 경제계, FBI, 정치인 등 다양한 이해세력이 얽혀있음을 밝히려 했던 짐 개리슨 검사가 그 절대적 복합세력을 '그들'이라고 호명한 것을 따라, 난 양반사회의 이성체계를 단수형인 '그것'이 아니라, 복수형인 '그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힘이 작동하기는 하나 어느 하나의 주체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영역이 확산되어 있으며, 그만큼 복잡 다단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무리가 뭉쳐있지만, 사실 그 틈새에서 무수히 이질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일성이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일집단을 이루고 있는 마초적인 남자들도 희생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도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저자가 거금 1백50만원이나 들여 구입한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난 후 정성스레 작성한 발제문이다. 이 책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 기간 사이에 발생한 떠들썩한 살인, 강간 사건을 다루고 있다. 난 책을 덮고 나서 담배를 문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참담하고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양반의 논리가 혹시 이 시대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가설까지 세워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들-가령, 꿈에 남자를 봤다는 이야기가 와전돼 죽음을 면치 못한 한 노비 여성과, 강간을 당하고도 원인제공자 내지는 사회적 불순분자로 내몰려 희생당한 기생, 첩, 비구니, 무녀 등의 이야기 등-이 33편이나 실려있기 때문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조선을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을까. 과대망상인가.

예종의 딸과 정혼을 맺은 임광재가 가섭이라는 아름다운 노비를 집단강간했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왕가의 식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지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무서워 그 전말을 잘 폭로하지 못하는 어떤 비구니는 조선의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남자들의 성욕에 의해 강제로 아비의 연인이 되었다가 아들의 연인이 되기도 한 한 여인은 중형을 받게 되지만, 욕망을 그릇된 방식으로 해소한 남성들은 개국공신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가벼운 형을 받고 만다. 여인네들이 받은 정신적 육체적 상흔들은 편히 앉아서 책을 읽는 나에게도 전해져 오는데, 조선의 심판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들'은 아직 인간 존재 자체의 고귀함을 사유하는 능력 보다는, 사태를 정치와 권력의 논리를 중심으로 계산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부장 남성 양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즉 조선사회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희생을, 노비의 희생을, 기생, 비구니의 희생을 매우 편히 앉아 관찰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전례로 삼아, 양반의 권위와 조선의 근간은 자연적이라는 것을 강제했다. '자연'에 도전하는 것은 오염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국가이성이 나서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권력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그 존재 조건을 강화하기 위해, 권력이 아닌 것에 '현상학적 말소'를 선언하는 이러한 태도가 혹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거대서사(grand-narrative)가 담지않은 주변부의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귀납적으로 추출된 가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개인적 의문, '우리 어머니는 왜 아버지 보다 자신을 많이 희생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이 책에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하나의 연역적 가설('조선시대 여성들은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살아야 했을 것')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여성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 '날 것'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의 속편 혹은 그 후속작이 기대된다. 하지만, 실록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사료를 통해(민담, 구전, 문학...) 21세기 대한민국이 아직도 지니고 있는 조선의 흔적들을 꼬집어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보는 '현재적' 작업도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장기지속'의 역사적 오류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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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기적을 만든 한 정신과 의사 이야기
이브 A. 우드 지음, 김무겸 옮김 / 글항아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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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과 학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벌써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양자 모두 ‘교화의 주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고장난 정신활동을 ‘정상’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약물 투여에서 감금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폭력을 행사하는 정신병원과, 학생들에게 지식을 투여하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때로는 직접적인 형태의 물리적 폭력(체벌, 근신, 봉사활동, 퇴학 등)을 행사하는 학교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병원과 학교는 근대성이 설정한 ‘정상’이라는 기준을 두고, 그와 다른 형태를 띠는 모든 것들을 ‘병리현상’, 즉 ‘교화의 대상’으로 응시한다. 이들은 보편적 이성을 가지고 보편적인 역사를 살아갈 ‘근대적 인간’을, ‘이성’과 ‘문화’라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직조해내고 있다.

나는 미셸 푸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재미없는 말들은 정신과 의사들을 생각할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내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정신과 의사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들의 수퍼에고가 되기 위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매우 싹수가 노란 이미지이다. 환자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 약물을 투입하여 진정시키기 급급한 그런 의사들만 봐왔기 때문일까.

군 시절 내가 아끼던 소대원 두 명이 정신이상을 판정받고 국군통합병원에 감금되었을 때, 의사들은 그 아이들에게 어떠한 따뜻한 인사도, 반드시 치유케 해주겠다는 믿음도 주지 않았다. 그저 알약을 정기적으로 복용케 하면서 아이들의 머리를 멍청하게 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흐려져만 갔고, 급기야는 군 복무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회로 배출되었다. 군에서 수용해 문제를 발생시킬 수 없으니 사회로 나가 각자의 길로 가라는 것이다. 책임 회피다. 어쨌든 내게 정신과 의사의 이미지는 그렇다. 정신과 의사를 생각할 때 프로이트의 대화요법이나 최면술 등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황들만 생각하는 소박한 친구들이 있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거의 모든 정신 치료의 첫 단계는 약물요법이라는 것이다.

<희망>의 저자 우드 박사의 이야기는 너무나 간단하다. 어쩌면, 책을 다 읽고, ‘에게~ 그냥 이런 내용이야?’하며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자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육체와 정신, 영혼의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하고, 각 영역에 균형있게,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치료법이야 말로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효과는 둘째치고라도 도의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다. 우드 박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이라는 세 개의 다리를 한 개의 의자 아래에 놓아두는 방법이다. 고장난 주체를 치유코자 할 때에는 이 세 영역을 모두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드 박사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그간 통합되지 못한 방법론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드박사와 그녀의 책에 박수를 보낼 만한 이유는 따로 있다.

먼저 개인적인 이유 하나, 정신과 의사에 대한 나의 편견을 누그러뜨렸다는 것. 바로 첫번째 이유다. 개인적 이유만으로 이 책을 평가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용서하시라.

육체와 정신, 영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애매모호하다. 가령, 사물에 대한 집착증(정신적 문제)이 대뇌의 이상(육체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육체적 결함이 없음에도 정신 그 자체의 문제 때문에 나타난 것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각 부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여서 특정 영역에만 국한된 치료는 결코 완벽한 치료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생각인데, 우드 박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주체를 붙들고 있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각 부분들을 통합적으로 끌어안고 가야만 환자가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녀가 인간을 육체와 정신, 영혼으로 쪼개어 파편화시키지 않고 온전한 주체로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점이 그녀와 이 책이 칭찬을 받아 마땅한 두 번째 이유다. 의사들이 환자를 이렇게만 바라봐준다면,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할 것이다. 이는 환자와 의사 간의 친밀감, 믿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강박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의 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들을 ‘완치’해 내었다는 저자의 생생하고 재미있는 치료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세 번째 이유다. 우드 박사는 다중인격자였던 질리, 중독 장애를 앓고 있는 신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환자 새뮤얼 등 자신이 치료한 실제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생생하게 증명해보이고 있다.

칭찬받을 만한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과연 정신질환에 있어 ‘완치’라른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그녀의 이론대로라면, ‘육체의 다리’는 유전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이는 평생을 살아도 변하기 어려운 기질적 특성을 의미한다. DNA에 따라 결정된 사항이 과연 약물치료와 대화요법을 통해 변화될 수가 있을까. 완치나 치유라고 하기 보다는 부정적 기질을 무의식의 더 깊은 심층으로 내려보내, 표층으로 발현되는 것을 좀 더 지체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어떠한 계기를 만나게 되면, 다시 그러한 기질은 표면에 부상하고 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의문. 과연 정신질환이라는 개념이 성립가능한 것일까. 좀 더 다르게 행동하고 좀 더 다르게 논리를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 아닐까.

정신과 육체에 관한 서양의 폭력적인 이분법. 플라톤에서 데까르트로, 그리고 중세시대를 거쳐 근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고방식은 사실상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정치 논리에 따라 동양은 서양의 사유를 답습해왔으며(한탄하고 비참해할 일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둘이 통합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었다.

더 이상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지 말자. <희망>에 나오는 육체, 정신, 영혼의 통합적인 사유체계와 방법모델은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주체를 위한 하나의 전범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당연한 발상이 맘에 든다. <희망>은 주체를 조각내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책이며, 인간성을 파편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책이다. 밋밋하고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 모범생 같은 제목과, 궁금증을 유발시키지 않는 매우 ‘친절한’ 부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별 다섯개를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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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2
칼 마르크스 지음, 고병권 옮김 / 그린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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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인가, 입대를 앞둔 몇 개월 전,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가 번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 학교 노동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수유 연구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병권씨가 번역했더랬다. 깔짝거리던 희랍어, 라틴어도 원문이 실려있다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구입했다. 2만 3천원. 역자의 고생에 비하면 2만 3천원이 대수겠느냐!

책을 펴는 순간 희랍어 오기(誤記)에 약간 실망했지만, 그건 너무나 지엽적인 것인지라, 기쁨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 책을 '인문고전강독반' 커리로 강력 추천했기에 첫 발제는 내가 맡았었다. 물론, 아직도 이 책은 소화불량을 유도한다. 제대로 읽지 않았을 뿐이라며 스스로 위안해보지만, 역시나 내 게으름과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무비판적 글쓰기와 제도권적 글쓰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난 첫 발제문을 줄간격과 여백을 줄여가면서도 무려 6-7장으로 작성했다. 첫 발제를 위해 읽은 책도 본 텍스트 이외에 여러 권이 됐었다. 나름대로 뿌뜻했고, 문제의식도 있었다고(그 나이에 비하면) 생각했지만, 한 학형의 한 마디에 난 좌절했다. 다시는 이 따위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준은 유치하고 미미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자기에게 실망하여 절필을 선언한 글쟁이들의 마음과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그 학형의 비난은 '글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 말보다도 그리고 술자리에서 나에게 쏟아부은 상스러운 욕설에 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왜 그 말들에 연연해서 위축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땐 어리고 혈기도 왕성했는데.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였는데. 여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형과 나와의 대화가 카페 게시판에서 내왕했고, 주제는 '자기의식'과 '클리나멘clinamen'이었다. 그 학형은 텍스트를 너무 원심적으로 읽었고, 난 구심적으로 읽었던 게 첫 번째 충돌의 이유였다.

내 책장에 꼽혀있던 맑스의 책을 보다가 불현듯 그 시절 생각이 났다. 내가 하는 말을 스스로 이해못하는 나. 그렇게 내 말들은 나를 떠나갔다.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쳐 보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다시 주절거렸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에 의해 적용된 충돌의 구체적인 형식들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계약 사회적 영역에서는 우정이 최고의 선으로 칭찬된 것이다."

'충돌'은 또 다른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원자들 사이에서 '휘어짐'(편위; 클리나멘)을 통해 발생한다. 클리나멘을 통해 원자는 '자기의식'을 드러낸다. 그래서 맑스에 따르면, '원자들의 충돌 안에서 직선으로 낙하하도록 위치지워진 그들의 물질성과 편위 안에서 정립된 원자의 형식규정은 종합적으로 통일'된다. 이런 통일이 자기의식의 첫 번째 형식이란다. 나에겐 이런 개념이 중요치 않았다.

다만, 충돌은 어쩌면 반동(혹은 반발)이라는 것이 중요했고, 그런 흐름들이 계약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위치한 우정만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정의로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라는 2장 마지막 구절이 중요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맑스는 별다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잠깐, 선배 H의 말을 떠올려 본다. 내가 벽을 손으로 민다고 치자. 벽을 구성하는 원자와 내 손을 구성하는 원자, 현대 물리학의 개념으로 보면 미립자라든지 소립자 따위를 생각해야겠지만, 이 두 부류의 원자 더미들이 서로 융해되지 않아야 난 벽을 손으로 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돌이고, 반발이다. 벽과 손이 서로 반동하지 않으면 내 손은 벽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과 손은 붙어있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이런 거다. 붙어있지만, 자기가 남아있는 것. 계약적 관계의 망 속에서 인정되는 우정으로 서로 붙어있지만, 끊임없는 반발력으로 주체성을 지속적으로 재정립해 가는 것.

내 친구들과의 지난 대화나 내가 그네들에게 보였던 태도, 그네들이 나에게 보여준 태도를 떠올려보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 어쩌면 매우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실망도 하고, 언짢아도 하고, 속으로 욕도 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라..

우린 같이 인간이지만, 같은 인간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추상적 질료'이다. 인간이 관계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인간들 사이에서 충돌을 통한 관계 형성에 따라 특수하게 규정될 뿐이다. 그래, 동일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동일한 태도를 교환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자. 씨부렁거리지도 말자. 다만, 우린 서로에게 자신만의 질료성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 내 고유한 질료성을.

어쩌면, 정의는 각자 안에 있지 않고 서로의 질료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구차한 말들은 집어치우자. 대신 그 선배가 좋아하던 <before sunrise>의 대사를 떠올려본다.

"You know,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만약에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에 없어. 너와 나 사이의 이 작은 공간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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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
조영남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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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만의 친일선언"이다. 제목 자체만으로만 보면 상당히 도발적이다. 난 제목만을 보고, 이제 조영남 맞아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까지 했었다.

게다가 이 책 한 권으로 다니던 방송사까지 다 그만두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한 책인가 싶었다.그래서 돈을 아끼지 않고 부대 매점에서 이 책을 샀다.

근데 웬걸? 도발적인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책은 한반도의 한민족(한민족? 피부색깔만 같으면 한민족인가?)이 '쪽바리'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편견들에 대하여 '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편견은 사실 합리적인 생각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관심을 끌기 위해, 혹은 내심 책이 팔렸으면..하는 마음에 영남이형이 자신을 일컬어, '지일파', '친일파'라고 호명하고 있을 뿐이다. 영남이형이 신사참배를 했다는 것도 과장된 소문이었다. 왜들 언론은 계속 이따위로 사람들을 가지고 놀지?

그리고 왜들 사람들은 그 기득세력을 위한 언론이 하는 말들에 놀아나는 걸까?

난 뉴스를 안본다. 티-브이도 없고, 퇴근하면 피곤하기도 하고, 시청해봐야 그 소리가 그 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상식한 내가 가끔은 뉴스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해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 뉴스를 보면, <왜, 그게 문제가 되지?> 한다. 무식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문제시해야 할 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기능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이들은 장난만 하고 있다.

군에 대한 보도들, 정당 간 이해득실에 관한 보도들, 요즘이 더 살기 힘들다고 경제적 수치와 생활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보도들, 한 명의 한국인이 성공해서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 그 개인에 빌붙어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크게 떠들어대는 보도들. 다 개수작이고 개소리들이다.

이런 언론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오직 조영남 뿐이랴.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영남의 <친일선언>은 단지 우리 안에 내재한 反-일본적 파시즘을 아주 소박한 수준에서 유머러스하게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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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정신 동문선 현대신서 117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동문선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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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6년 6월 20일에 작성한 것. 블로그를 정리하기 위해 글을 옮김.
평점이 두 단계 내려간 것은 이 얇은 책을 8천원이나 받아먹는 동문선의 태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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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나왔던 글
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동문선에서 나온 이 책을 결코 구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신문사에 있길래 낼름 집어와
읽었다. 36페이지-
30분이면 다 읽어버릴 이 책이 8천원이라니
난 먼저 출판사에 저주부터 쏟아부었더랬다

민족주의니, 시오니즘에 저항하는
무자히딘의 목숨을 건 투쟁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들은
이 책에서 중요치 않다

단, 이미지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키 포인트고,
사유의 핵이고
성급할지 모를 결론이었다

이데올로기니 개념이니 하는 것들은
더이상 중요치 않은 순간이
다가온 것

이젠 이미지가
상상이
그래서, 시뮬라크르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서
아니,
된지 오래여서
이미지가 현실을 뛰어넘고
그 이미지를 통해
다시금 현실을 해석하는
초월적 인간만이 설치는 시대

초월적 인간은
transcendental한 인간은
아니,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 해도
이미지의 힘 앞에서 무력하고

그것을 현실인 양 치부해버리기
십상인지라
현실은 어느 순간 무기력에 빠진다

사실 관계 보다도 상상이,
가상이,
즉, 시뮬라크르가
더욱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

우린 상상을 현실에
투영하고,
상상적 이미지를(하지만, 분명
눈 앞에 와닿는 이미지를)
현실로 착각한다

그래서 오해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건 오해가 아니다
이,
오해가 아닌 지점에 서서
너와 난 소통을 시도한다

 
* 수많은 사람이 죽어버린 참담한 사건 앞에서 이미지와 가상을 들먹거리며 현실적 비극 내지는 고통을 은폐시키는 보드리야르의 글을 읽고서 씁쓸한 마음에 몇 자 토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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