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조선이 버린 여인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먼저 주어. '조선'이라는 명사를 통해 호명된 '버리는'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국가권력? 남자?

그 다음은 목적어. 어떤 여인들이 버림을 받았을까. 권력의 주변부를 배회하던 여인들? 왕비? 양가의 규수? 그렇다면, 이 책은 도서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암투에 관한 또 다른 버전일 것. 웬만한 소재가 아닌 이상에 이런 식상한 책이 나왔을까. 그렇다면, 권력과 상관없이 지내는 평민이나 노비? 아님 기생? 그렇다면 희대의 섹스 스캔들로 희생된 여인들?

마지막, 동사. 과연 누군지 모를 그 여인들은 버림받을 짓을 했을까. 현대의 윤리기준으로 봤을 때도 버림받을 이유가 있었다면 책으로까지 묶여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역시 이성을 신봉하던 모던 사회였다는 내 소박한 생각에 따를 때, 지금의 에토스와는 양립할 수 없는 또다른 이성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마지막 의문에 들어서 난 책을 읽지도 않은 채, 그 이유가 가장 궁금해졌다. 왜 어떤 여인들은 어떤 주체로부터 버림을 받았을까. 도대체 왜?

명민한 독자라면 벌써부터 짐작했겠지만, 어떤 여인들을 버린 주체는 조선시대 남성 양반사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의 욕망이 스물스물 베어들어간 양반사회의 이성체계가 그 주범이다. 이것은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에 철저히 봉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反여성적이고, 反인간적인(현대의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anti-humanistic한), 양반들의 건축물이다. (들뢰즈와 가따리를 따라) 이 '건축'이라는 용어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양반의 이성은 곧 국가였으며, 사회 윤리였고, 따라서 행위의 기준이자 규범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어 개인을 초월하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는 이것이 '강상윤리'라는 이름의 시스템으로 등장한다.

존 에프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군산복합체, 경제계, FBI, 정치인 등 다양한 이해세력이 얽혀있음을 밝히려 했던 짐 개리슨 검사가 그 절대적 복합세력을 '그들'이라고 호명한 것을 따라, 난 양반사회의 이성체계를 단수형인 '그것'이 아니라, 복수형인 '그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힘이 작동하기는 하나 어느 하나의 주체를 탓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의 영역이 확산되어 있으며, 그만큼 복잡 다단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슷한 무리가 뭉쳐있지만, 사실 그 틈새에서 무수히 이질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일성이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일집단을 이루고 있는 마초적인 남자들도 희생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도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저자가 거금 1백50만원이나 들여 구입한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난 후 정성스레 작성한 발제문이다. 이 책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 기간 사이에 발생한 떠들썩한 살인, 강간 사건을 다루고 있다. 난 책을 덮고 나서 담배를 문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참담하고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양반의 논리가 혹시 이 시대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가설까지 세워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들-가령, 꿈에 남자를 봤다는 이야기가 와전돼 죽음을 면치 못한 한 노비 여성과, 강간을 당하고도 원인제공자 내지는 사회적 불순분자로 내몰려 희생당한 기생, 첩, 비구니, 무녀 등의 이야기 등-이 33편이나 실려있기 때문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조선을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을까. 과대망상인가.

예종의 딸과 정혼을 맺은 임광재가 가섭이라는 아름다운 노비를 집단강간했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왕가의 식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지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무서워 그 전말을 잘 폭로하지 못하는 어떤 비구니는 조선의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남자들의 성욕에 의해 강제로 아비의 연인이 되었다가 아들의 연인이 되기도 한 한 여인은 중형을 받게 되지만, 욕망을 그릇된 방식으로 해소한 남성들은 개국공신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가벼운 형을 받고 만다. 여인네들이 받은 정신적 육체적 상흔들은 편히 앉아서 책을 읽는 나에게도 전해져 오는데, 조선의 심판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들'은 아직 인간 존재 자체의 고귀함을 사유하는 능력 보다는, 사태를 정치와 권력의 논리를 중심으로 계산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부장 남성 양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즉 조선사회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희생을, 노비의 희생을, 기생, 비구니의 희생을 매우 편히 앉아 관찰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을 전례로 삼아, 양반의 권위와 조선의 근간은 자연적이라는 것을 강제했다. '자연'에 도전하는 것은 오염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국가이성이 나서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권력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그 존재 조건을 강화하기 위해, 권력이 아닌 것에 '현상학적 말소'를 선언하는 이러한 태도가 혹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거대서사(grand-narrative)가 담지않은 주변부의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귀납적으로 추출된 가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개인적 의문, '우리 어머니는 왜 아버지 보다 자신을 많이 희생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이 책에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하나의 연역적 가설('조선시대 여성들은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살아야 했을 것')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여성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 '날 것'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의 속편 혹은 그 후속작이 기대된다. 하지만, 실록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사료를 통해(민담, 구전, 문학...) 21세기 대한민국이 아직도 지니고 있는 조선의 흔적들을 꼬집어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의 원형을 복원해보는 '현재적' 작업도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장기지속'의 역사적 오류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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