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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빈곤으로 인해 마음이 허전하지 않은가? 마음의 치유를 할 수 있는 클레멘트 코스가 있다.클레멘트 코스가 만들어진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교 정규수업 수준의 내용으로 주로 빈민을 대상인 인문학 강의다. 인문학강의가 지루하고 어려워 누구나 꺼려하는 학문이다. 빈민들의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클레멘트 코스가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사회의 빈곤과 홈리스는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가장 큰 원인이 빈민들 마음속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빈민들의 경제란 생계유지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대다수의 빈민들은 이런 의미 속에 갇혀있다는 인식을 준다. 빈민들에게는 경제가 생계수단일지 몰라도 적어도 미국사회에서 경제는 경제활동을 하여서 생기는 소득, 소비에 있어서 상품, 상품을 교환하기 위한 화폐, 국가 간의 무역 등 다양하다. 빈민들에게는 경제라는 용어가 고정된 시각에서 바라보았기에 당연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정치는 빈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일까? 본래 정치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민주정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18세 이상 남자들이 사회에 목소리를 냈다. 참여범위가 확대되면서 정치는 온 가족의 참여로 발전하였다. 정치는 참여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빈민들에게는 전혀 먼 나라의 이야기다. 빈민들의 입장이랑 판이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정치란 빈민들의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가 아니다. 부를 축적한 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다. 정치는 빈민들에게는 무의미한 단어에 불과하다.
클레멘트 코스에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과연 빈민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다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충분히 정치참여의 기본요건은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부의 축적이 정치참여에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일단 빈민들의 의식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의식수준을 높인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부의 축적과 의식수준이 높아진 만큼 활동이 있어야 한다. 요건들이 하나라도 부족하게 되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유권자들의 선호도나 지지가 낮아질 위험이 있다. 3가지의 요건이 충족하면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배우는데 있어서 철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경제와 정치가 빈민들에게 외면적인 반성을 가지게 된다면 철학은 내면의 반성을 할 수 있는 좋은 학문이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따라서 내면의 자아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중국이나 그리스에는 일찍이 철학이 발달하여 내면의 고뇌를 한 번에 해결되는 메시아처럼 철학자들이 많았다. 철학이 항상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시대를 많이 반영한다. 같은 내용의 철학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해결을 못할 수 있다. 미국사회가 딱 그런 이야기다. 미국사회가 이런 깊은 고민에 빠진 것도 철학이 늘 정답이 될 수 없지만 미국사회 내에서 철학을 받아들이고, 방안을 제시할 주체가 없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철학이 빈민들을 위기에서 구출할 중요한 위치에 있다.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은 무엇일까? 미국사회에서 태어나 미국사회의 일원이다. 작은 범위로 들어가면 한 가정의 구성원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삶이란 역사의 기록 속에 구분할 수 있는 한 단어가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삶을 하찮게 여겨 역사의 기록 속에서도 완전히 빠진다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물론 개인적으로 역사에 남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상 이름과 형체가 없는 것과 같다. 삶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다. 클레멘트 코스 내에서의 배움은 삶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경제로 돌아가서 노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계수단으로 노동을 파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보내준 신성한 의무일 것이다. 동식물들이 노동을 한다는 말은 아이러니하며 유머러스하다. 인간에게 생각할 능력을 주었으며 몸을 움직여 정당한 평가를 받으라는 말이다. 노동 역시 하찮게 여겨서 땀의 대가의 정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노동은 돈벌이가 아니고, 성취감, 만족감 등 내면의 동기를 유지시켜준다. 신체의 사용은 외부의 고통으로 내부의 성취를 얻을 수 있다.
클레멘트 코스의 최종목표는 힘들고 억압을 받았던 지난날을 반성과 성찰에서 희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미국사회 내에서는 클레멘트 코스를 빼고 희망을 가르치는 조직은 없다. 인문학, 특히 철학적으로 상호토론과 독서를 통해 미쳐 배우지 못했던 여러 가지의 삶의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래서 가장 큰 원인은 마음속에 있었다. 하고자 하는 욕망만 있다면 시간이 걸려도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받을 수 있다. 절망에서 계속 머무르는 것은 희망이 없는 삶이요, 사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삶의 모든 짐을 벗어 던지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 나가는 거다.
마음속의 빈곤에서 벗어나라. 클레멘트 코스가 주는 의미다. 경제적인 절망을 느꼈기에 마음속에서도 절망만이 가득 차있다. 깨우치지 못하면 깨워라. 한 순간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다. 마음속의 허전함을 다른 사람에게 풀어 해결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늘에서 내려준 최고의 선물, ‘인간의 삶,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마치려고 한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모든 것이 제자리일 때 작은 희망의 발견은 치료를 넘어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