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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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애란 작가가 2012년~2017년 사이 발표한 단편 7편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어쩌다보니 작가의 첫 소설집인 <달려라, 아비>를 읽고 바로 최신작을 읽게 되었는데, 글이 많이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려라, 아비>가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신인 소설가의 작품이었다면, 이번 소설집 <바깥은 여름>은 작가가 보다 능숙하게 완급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달까.

 

 <바깥은 여름>이 당연히 표제작인 줄 알았는데, 제목을 따로 붙인 거였다. 보통 표제작을 선정하는 단편집에서 이렇게 따로 제목을 붙이는 데 신경을 많이 썼을텐데, 모든 작품을 다 어우르는 좋은 제목인 것 같다.

 

수록된 작품은 총 7편,

입동 / 노찬성과 에반 / 건너편 / 침묵의 미래 / 풍경의 쓸모 / 가리는 손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느 더운 여름날, 스노우볼을 상상해 본다. 구 바깥은 찌는 듯한 더위이지만 안은 여전히 서늘하다. 7편의 작품은 이렇게 풍경과, 계절과, 세상과 시차를 겪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매일 보는 8시 뉴스의 사건 사고 소식에서 들리는 한 줄의 기사가 ― 어린이집 차량이 후진하다 아이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했다든가, 과속하던 고속도로 차량이 갓길에 있는 사람을 치어 숨지게 했다든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려던 선생님이 사흘간 투병하다 끝내 숨졌다든가 하는 기사들이 ― 사실은 누군가에게 사태事態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상상력이 메마른 인간이며 또한 앞으로도 숙명적으로 사태 이후의 삶에 얼마나 무관심할 것인가를 조곤조곤 지적한다.

 

 얼마 전 <비정상회담>에 나온 김영하 작가가 '소설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와닿는 소설집이었다. 바깥은 온통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나느라 애쓰는 이들의 삶을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그 상상이 얼마나 어둡고 아픈 것인지 생각해본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십 분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길 본다고, 나는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23p)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32-33p)

당시 찬성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잘 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어른들의 잠을 깨우지 않는 거였다. (43p)

와사삭― 와삭― 청량하게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찬성 귀까지 다 들렸다. 찬성이 자기 손바닥을 가만 내려다봤다. 얼음은 사라지고 손에 엷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찬성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찬성은 그게 뭔지 몰랐다. (48p)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52p)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98-99p)

명학이 그때서야 ‘누구?‘ 하는 얼굴로 도화를 슬쩍 바라봤다. 명학의 서글서글한 눈에 선의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화는 속으로 ‘아직 덜 실패한 눈……‘이라 중얼거렸다. 오래전 저 눈과 비슷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자신도 가져본 적 있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114p)

―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115p)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118p)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터뜨린 울음, 어쩌면 그게 내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죽기 전,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떤 이의 절망, 그것이 내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이름을 못 왼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순 있다. 당신이 누구든 내 말은 당신네 말로 들릴 것이다. (124p)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맞봤다. (128p)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132p)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 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142p)

나는 그 광경이 늘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악몽 같은 아름다움이었을까. 앞으로도 지구가 꾸는 이 예쁜 꿈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죽은 뒤 한번 더 죽으면서도 나는, 그 눈부신 장면으로부터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146p)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중략) 과거가 될 만반의 자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러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사진기를 보고 웃었다. (150p)

일상 위에 가짜 크리스털처럼 박힌 비일상성과 만나 반갑게 손 흔든 뒤, 돈 쓰고 헤어지는. (169p)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200p)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 (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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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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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는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이 나지만, 당신과 세계가 존재하여 비로소 완성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영원한 화자>와 <나는 편의점에 간다>.


 영원한 화자에서 드러나는 표현 방식이 너무 좋았다. 몇 번을 읽고 밑줄을 그었다. 필사하고 싶은 단편이었다. 무릇 소설가라면 이 정도의 글은 쓸 줄 알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냉소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저 사람은 허영심이 많은가 그렇지 않은가. 저 사람은 냉소적이고 허영심도 많지만 어쨌든 나를 좋아한단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알기' 전에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하나 가끔은 알 수 없는 쓰다듬에 숨죽이는 사람이다. (114p)

 

 소설 제목에서 유추해낼 수 있듯, 이 단편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영원한 화자'인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영원히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그것도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나 스스로에 그치지 않고, 당신에게로 뻗어나간다.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이, 나아가 세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줍고 다니는 사람, 나는 나의 수집가, 나는 나를 찌푸린 눈으로 보는 나에게 가장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말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호프집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상체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조금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내 앞사람이나 옆사람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114-115p)

 

 (“나는 말을 줍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썼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의 이야기 속 영원한 화자이다. 그러나 인생의 플롯은 대개 '나' 하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화자는 필연적으로 나와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고, 그리하여 재코드화"하는 타자화의 과정을 경험한다. (해설에서 인용)


 작가는 이 무한의 타자화 과정을 두서없이 경험하는 자아를 포착해내어 그만의 독특하고 세련되고 중독성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작가가 개인의 내면을 포착해내는 지점도,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모두 맘에 쏙 든 단편이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작가의 섬세한 관찰과 세세한 표현이 눈에 띈다.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가의 상상력이 두려워지기까지 하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두고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소설을 쓰는 이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 아니냐고 한 적이 있었는데(좀 거친 표현이긴 하다. 하나의 소설이라는 세계가 소설가의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경이롭다는 의미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큐마트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뜻밖에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내 정보들이 매일매일 그가 들고 있는 바코드 검색기에 찍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그는 나의 식성을 안다. 대여섯 종류의 생수 중 내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구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흑미밥과 쌀밥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등을 말이다. (중략) 그는 나의 생리주기를 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생리대를 사가는 나를 본다. 그는 콘돔갑을 뒤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나를 본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46-47p)

 

 이 단편은 편의점을 애용하는, 1인 가구를 대표하는 한 여자의 독백이다. 여자는 여자가 돈을 주고 사는 모든 것이다. 여자는 여자가 편의점에서 구매하는 것들로 설명이 가능하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집이 어디고, 언제 섹스를 하고 언제 생리를 하는지까지, 즉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낱낱이 편의점 포스기에 ‘보고’되는 것이다.


 상품 하나하나의 바코드가 찍힐 때마다 여자는 맞은편에서 무표정하게 상품을 하나씩 집어 확인하고 '삑-' 소리를 낸 뒤 내려놓는 점원이 신경 쓰인다. 어쩐지 그의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평가당하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저…… 아시죠?"

그는 도시락을 쥔 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이 근처 사는…… 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랑 사갔었는데……"

청년이 계속 모를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깨끗한나라 화장지랑, 쓰레기봉투는 꼭 10리터짜리만 사가고, 햇반은 흑미밥만 샀는데…… 모르시겠어요?"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취중에 함께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기억해내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50-51p)

  

 실상은 조금 다르다. 나를 보고 있다 생각했던 편의점 직원은 사실 내가 아니라 상품을 보았을 뿐이고, 상품을 통해 이야기되는 나 자신은 상품이 없어진 자리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를 이야기하던 상품이 "어느 분이나 사가"는 흔하디 흔한 상품인 것도 당황스러운데, 상품을 상실한 내가 느낄 당혹감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더 이상 스스로를 설명할 길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그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어디에서였더라? 패밀리마트에서 봤던가? 엘지25에서 봤던가? 어디에서였지? 그러나 나는 그를 기억해낼 수 없다. 다만 어쩌면 그도 나처럼 편의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54p)

 

 결국 매개의 상실은 존재 자체에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어쩌면 그는, 어쩌면 나도, 편의점(매개)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품게 된다. 그런데 이 존재감 상실의 경험이 단순히 ‘인간소외’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투명인간이 된 개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편의점에 가는 여자는 정말 소외된 존재가 아닌 것 같고, 여자가 스스로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연민을 요하는 것이 아닌 것 같기에.

 


 작가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 그러한 글쓰기가 잘 드러난다.

 

 썩 유쾌하지 않은 주제란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이야기 속 화자는 '아버지'라는 자신의 기원을 찾아간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상상하기도 하고(달려라, 아비) 하릴없이 앉아 텔레비전만 보는 아버지의 낡고 하찮은 하반신을 상상하기도 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수족관 안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를 부르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하기도 하며(사랑의 인사) 자신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졸음을 참아가며 듣기도 한다(누가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가).

 

 각각의 소설에서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닥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가족과의 불화를 경험하는 한 개인의 성장소설을 읽다보면 보통 기대하는 바가 있다. '불화를 극복해내거나/불화의 원인을 향한 복수를 통해 더더욱 성숙한 내면을 갖게되는 개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아버지와의 불유쾌한 관계를 경험하는 자녀들이 과연 이를 통해 어떤 통찰력을 얻고 성장해나가는가는 의문이다.

 

 그날 어머니는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채 가만히 누워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생활,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잔디깎이,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해왔던 상상이라 잘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6-27p)

  

 작가는 자녀와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개인의 성장이나 새로운 깨달음, 세계를 이해하는 통찰력 따위는 독자의 상상에 달려있는 모양이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말하기)는 생소하여 흥미로웠다. 특히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를 읽으며 '아, 어쩌면 이 작가는 천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죽은 아버지를 여전히 상상 속에서 유목시키거나(달려라, 아비)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부지런했던 하반신을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하여 관계 회복에 실패하기도 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를 향한 필사의 인사는 수족관 유리벽에 가로막히며(사랑의 인사), 아버지가 들려주는 자신의 기원이 그다지 근사한 것이 아님을, 사실 별거 아님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누가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가)

 

 그러니까 소설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관계를 통한 성장이나 통찰이 아닌, 비정상적이고 불유쾌한 관계 자체이다. 가족소설이라고 말하기도, 성장소설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비뚤어진 모습의 이야기 각각이 생각보다 유쾌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낯선 말하기 방식 뒤에 남겨진 의미를 더 곱씹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해설을 쓴 김동식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스듬한 가족 로망스"라 표현한다.

 

생물학적 기원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상상은 전형적인 가족 로망스의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가족 로망스의 일반적인 특징인 자기연민에 근거한 복수의 환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중략) 아버지는 나를 가능하게 한 생물학적인 기원이 아니라, 나의 억압된 무의식으부터 연유하는 일종의 징후이다.


생물학적 기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과 관련된 징후로서의 아버지. 이를 두고 아버지와 관련된 새로운 발상법의 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줄곧 부정하던 아버지를 임종과 함께 긍정하게 되는 플롯도 아니고,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 포즈로 윤리적 거점을 마련하는 서사전략도 아니다. (중략) 아버지와 관련된 두 번의 긍정이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즐거운 의지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자기배려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정신적 상처의 기원(아버지)을 유목시키는 독특한 상상력은, 김애란이 보여준 한국문학의 새로운 풍경이기도 하다. (248-249p)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나는 외로워졌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고, 햇빛은 헤어진 애인이 보내온 예의바른 편지처럼 여전히 저쪽 방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예의바름, 그것은 태어나 내가 세상에 대해 느낀 최초의 불쾌였다. (9p)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16p)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 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들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들이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61p)

점프할 때 보이는 동네의 풍경은 순간마다 달랐다. 콩, 하고 뛰어오르면 조금 전 보이던 아저씨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다시 콩, 하고 날아오르면 아까는 없던 여중생이 나타났다. 나는 설핏 보이는 먼 곳, 그 ‘언뜻‘함이 좋아 자꾸 발을 굴렀다. 그러다 언젠가는, 온힘을 다해 뛰어오르며, 두 발이 땅에 닿기 전 내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65p)

그 미소가 하도 해맑아,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런 뒤, 갑자기 형을 그렇게 크게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배신인 것 같았다. (71-72p)

"마음이란 거, 참 이상하지?"
나는 형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배낭여행도 그 사랑과 관련있을 거라고. 우리는 약속한 듯 침묵했다. 나는 그가 내게 어른 대우를 해주는 게 좋았다. 나는 안테나가 가리키는 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먼지냄새를 맡으며, 내가 이곳에서 혼자 "나야……" 하고 말하면 저 별 어디에서 누군가 울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75-76p)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79-80p)

그러니 이쯤에서, 한가지 거짓말에 대해 고백해도 좋을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에게 고추를 보여주고 스카이 콩콩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스카이 콩콩에 올라 콩콩대는 것을 좋아해다. 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스카이 콩콩을 타며 본 것, 혹은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스카이 콩콩의 점프 시간은 그렇게 길지도, 느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스카이 콩콩은 코오오오-옹 하고 뛰어올라 코오오오-옹 하고 착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콩콩‘ 타는 것이었다. 스카이 콩콩에 장착된 스프링의 탄력은 형편없었다. 스카이 콩콩에 오른 뒤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정신없이 콩콩콩콩콩- 거려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자세를 유지하려고 버둥대는 몸짓은 경박하고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스카이 콩콩은 스프링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살면서 누구나 내는 소음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붕- 하고 떠올랐을 때, 가로등이 내게 슬쩍 보내온 윙크는, 거짓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80p)

나는 농담을 좋아하지만 재치있는 사람을 보면 적의를 품는 사람. 나는 때론 돈 만원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이며, 현금지급기 앞에서 항상 뒷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115p)

나는 낯선 이들을 웃기고 난 뒤 안도하는 사람,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은 수난자들의 질문입니다‘라는 알료사의 말에 밑줄 긋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115-116p)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것들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117p)

그러니 어떤 우연들은 11시 11분처럼, 혹은 4시 44분처럼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날 그 시간, 그 칸에 당신이 앉아 있었다는 우연. 순전히 그때 시계를 본 사람의 몫인 행운, 혹은 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시 11분은 매일 지나가는 시간이므로 우리가 만난 것은 만난 것이 아니다. (120-121p)

다만 그때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아주 작은 것들, 당신이 젓가락을 잡았던 방식이나, 당신이 술안주로 베어물고 내려놓은 오이에 난 이빨자국, 기이하게 생겼던 엄지발가락 모양, 내가 반해버린 남자 배우를 무시할 때 지었던 표정이나, 당신이 조용히 뒤집어주던 삼겹살 색깔 같은 것들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아주 작은 것들 때문이듯.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도 비슷할지 몰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지하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오래전 꼭 지금 같은 날씨에, 꼭 지금 같은 시간에 당신과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며 했던 놀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133p)

그리하여, 한번 더, 그리하여 여전히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136p)

나는 긴 주소지, 나는 제목만 따라 부르는 팝송, 나는 사진처럼 언제나 조금씩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가보다,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이다. 나는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 그러나 무엇에나 쉽게 감탄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 나는 뻔한 사람, 그러나 당신이 뻔하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137p)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138p)

내 꿈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보통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보다 두배는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말이다. (148p)

하지만 그는 한자나 영어를 읽을 줄 몰랐고, 그가 읽는 신문은 대부분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다행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속지 않을 수 있었다. (199p)

나는 하나의 목록이다. 지속적으로 코드화되고 탈코드화되며 재코드화되는 자아이다. 따라서 "나는 아직 잔뜩 남겨진 자"이며, 자기 자신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타자의 영역이다. 그리고 ‘타자로서의 나‘에 의해 세상의 오해 가능성과 아이러니는 문학적 의미의 생산가능성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255p)

생활은 엄청난 에너지를 투여해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외견상으로는 대도시적 일상성에 대한 섬세한 소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생활감각은 근원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그가 제시하는 대도시의 일상은 관찰자의 눈에 포착된 풍경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자의 감각 바로 그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찰이 아니라 연루의 기록인 것이다. (256p)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의 주인공은 동네에 편의점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소비생활을 영위한다. "나처럼 혼자 자취를 하는 사람에겐 일정한 동선, 일정한 습관이 필요하기 떄문이었다." 왠지, 소속 계급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취향의 체계인 아비투스(habitus)와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57p)

나는 없다. 아니, 많은 나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똑같은 생활용품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5갱의 방에서,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일까. 1.5층 단칸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이 속하게 될 계층과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적 취향이 있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실존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또는 과거의 시간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근원적인 실존은 없다. 김애란의 소설에 의하면, 나는 아비투스의 구성물이다. 나는 관찰하는 섬세한 시선으로도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정한 계층의 아비투스로서 공간적으로 발현된다. 나는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관찰의 시선이 갖는 지위는 대단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김애란의 작품들은 관찰자의 시선이 갖는 계급성을 전복적으로 탈은폐한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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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들어가기 전에

1. 안나는 스위스에 정착한 미국인이다. 스위스는 독일어를 쓰는 나라이지만 표준독일어Hochdeutsch가 아닌, 일종의 지역 방언인 슈비처뒤치를 사용한다. 나는 오스트리아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데, 오스트리아도 스위스처럼 독일어를 쓰는 나라이나 내가 살던 곳에서도 지역 색 짙은 방언을 사용했다. 나도 안나처럼 외국인들 틈에서 독일어를 배웠고, 이 유사한 경험이 책에 더 빠져들게 했다.

2. 그리하여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영어-독일어(스위스어) 간 ‘의미심장한 설정’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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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에도 등장했지만, 그 유명한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떠올려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우연인지 아닌지, <하우스프라우>의 주인공 이름도 안나이다. 독일어로 가정주부, 혹은 기혼 여성을 뜻하는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집Haus’과 ‘여성Frau’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안나는 스위스 은행에서 일하는 스위스 남자와 결혼하여 스위스의 어느 시골마을에 사는 가정주부이다.

 

안나가 자신의 자그마한 일상을 살아가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그러므로 열차 시간표라는 평범한 사실이 안나의 일과를 조절했다. 디틀리콘의 버스는 시내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택시는 비싸고 실용적이지 못했다. 벤츠 가족에게 차가 한 대 있긴 했어도, 안나는 운전하지 않았다. 운전면허가 없었다. (11p)

 수동성을 인간으로 만든다면 바로 안나의 모습일 것이다. 안나는 운전면허는 물론, 은행계좌조차 없다. 남편이 무려 스위스 은행 직원인데도.


 이 책은 기본적으로 9월부터 11월까지 안나의 기록이지만, 소설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복잡하게 넘나든다. 안나는 불면증과 우울증 등의 이유로 정기적으로 메설리 박사에게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박사와의 정신 상담은 소설의 큰 축 하나를 이룬다.


 박사의 권유로 안나는 외국인들을 위한 독일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안나는 그곳에서 불륜 상대인 아치나 친구 메리와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 학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강의 내용, 학원을 다니면서 변화하는 안나의 일상은 서사의 또 다른 큰 줄기이다.


 마지막으로 안나는 두서없이, 그리고 복잡하게 과거를 회상한다. 아주 어릴 적인 경우도 있고 2년 전의 일이기도 하다. 안나는 행복했던 일, 불행했던 일, 후회하는 일 등을 복잡하게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작가는 복잡하게 넘나드는 시간의 결을 능숙하고 노련하게 엮어냈다.


 소설은 기차역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많지 않은 몇 개의 정류장은 그냥 지나치는 급행열차처럼, 목적지를 향해 따르게 내달린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마치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그대로 어딘가에 충돌하거나 탈선하고야 마는 열차 같다. 비유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기차역은 출발의 공간이지만 도착의 공간이기도 하고, 떠남의 상징이지만 머묾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차역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는 스위스인과 결혼한 미국인으로, 9년 간 스위스에 머물렀지만 제대로 된 독일어도 배우지 않은 채 스위스 어느 곳에도 정을 주지 않았다.


 타지에서, 그것도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안나가 느끼는 고독감은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래도 수동적인 여자였던 안나는, 그렇게 점점 더 수동성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안나가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내리는 결정은 섹스에 관한 것이었고, 남편 몰래 애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불륜이라는 식상한 소재가 고전에서부터 현대 소설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수동성에 빠진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어쩌면 육체적 선택(섹스)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가 아닐까.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동성에 빠진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에도 '누군가에게 원해진다'는 수동성이 내포되어있다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유일한 주도적 선택이라 믿었던 지점마저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잔인한 설정인 것이다.

 

안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섹스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의 수동성과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난공불락의 욕망에서 우러난 난해한 동반자 관계였다. 그리고 원해진다는 것에 대한 욕망. 그녀는 누군가에게 원해지고 싶었다. (62p)

 인간은 끝없이 소속감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적당히 점잖은 스위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골마을, 안나가 살아가는 장소가 얼마나 보수적인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는 지점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사는 집이지만, 안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집을 한 번도 ‘내 집’이라 부르지 않는다. 스위스는 안나에게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되지 못한 것이다.

 

미국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리워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스위스는 결코 고향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77p)

「안나,」 메리가 말을 꺼냈다. 「여기 속한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나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느낌이 어려있었다. 

그건 안나의 대답이 아니었다. (83p)

 그렇다고 그녀가 고향인 미국을 애절하게 그리워한 것은 아니다. 어디에도 정을 두지 못한 그녀 –를 비롯한 현대인들 – 에게 과연 ‘고향’이나 ‘집’은 어디인가를 질문해보게 된다.


 원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원형으로 빙 둘러앉으면, 우리는 구성원 모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원형 구도는 구성원간의 공평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소속감은 덤이다. 그러나 원 바깥의 세계는 철저히 배제된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우리는 원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지만, 원 밖의 인물에는 조금의 시선도 던지지 않는다.


 스위스는 안나에게 원과 같은 공간이었고, 안나는 원 밖에 있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미국이라는 원 안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원 밖에 서서 원을 만들어낸 이들의 뒤통수만 바라볼 뿐이었다. 고독한 인간은 그 원을 두드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한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버스 노선으로 연결되는 편리한 상가드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작은 필요와 사소한 바람을 담은 가깝고, 닫힌 원이었다.

원 안에 원, 그 안에 또다른 원. 안나는 자신이 사는 빡빡하고 제한된 세계를 넘어서 바라본다는 게 무엇을 함의하는 지 상상할 수 없었다. (58p)

 

언어유희를 찾아내는 재미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은 이 장편소설을 내기 전, 시집을 몇 권이나 펴낸 저명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읽었음)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적으로 파놓은 ‘의미심장한 설정’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언어유희’에서 오는 설정들이었다.

 

롤란트는 계속했다. 「Ich fahre ein blaues Auto. Aber – ich fahre das blaue Auto. 차이를 알겠습니까?」

안나는 알고 있었다. 부정관사와 정관사의 차이였다.

<일반>과 <특수> 사이의 단절이었다.

<저것들 중 하나>와 <이 특정한 하나> 사이의 넓고 맥 빠진 틈. (68p)

그리고 das Gift도. 안나는 떠올렸다. 선물이 아니라 독일어로는 <독약>이라는 뜻이지.

안나는 메설리 박사에게 영어 단어 트라우마trauma와 독일어로 꿈der Traum이 관련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한 사람의 꿈과 한 사람의 상처 사이에는 언제나 연관이 있죠.」 (74p)

 내가 독일어를 읽을 줄 알고, 책에 나오는 기초적인 수준의 독일어(원문에서 안나가 독일어로 생각한 것은 독일어로 그대로 기재하고 한국어 해석을 덧붙인 듯하다.)를 읽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기에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번역가는 어쩌면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쓰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과연 나라면 이러한 지점을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원어를 알면 쉬운 유희가, 언어의 종류를 바꾸니 어불성설이 되어버린다.


 안나가 갖는 궁금증은 언어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져볼 법한 것들이다. 이 단어와 저 단어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왜 이럴 때에 이런 단어를 쓰게 되는 걸까. 작가는 시인이기도 하다는데, 이 궁금증을 소설 속에서 자연스레 녹였다. 이야기 여기저기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해 놓은 것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안나의 목소리를 통해 작가가 던지는 언어(모국어와 외국어)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도 고민해볼 지점이다.


「한사람이 말하는 언어는 그 사람을 정의하죠. 한 사람의 언어는 세계에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줍니다.」 (268p)


한 사람의 모국어는 그를 그 사회 속에 자리 잡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제2언어는 성격을 드러낸다. 실수를 봐, 안나는 혼잣말을 했다.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주지. (269p)


현대판 안나 카레리나의 고전적 결론 (스포주의)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이는 결론에 대한 생각. 우선 나는 실망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다른 종류의 결론을 바랐다.


 수동성은 안나의 기질이고, 인간의 기질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가 이 수동성을 극복해내는 극적인 마지막을 바랐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삶’을 그리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현대판’ <안나 카레리나>의 ‘현대적인’ 결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안나는 언제나처럼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가치가 있는 한마디만 했다. 「모르겠네요.」
다만, 물론 안나는 거의 언제나 알고 있었다. (13p)

이름은 연약한 것이다. 떨어뜨리면 깨질 수도 있다. (44p)

고독은 그녀의 닻이었다. 익숙한 비참함, 하지만 가장 안전하고, 가장 분별 있는 접근 방식이었다. (65p)

다시 한 번 안나는 자기 스웨터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걸 망쳐 버렸어. 안나는 생각했다. 달리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는데. (66p)

후에 매점에서 안나는 아치와 메리, 남아프리카에서 온 낸시, 런던에서 온 에드와 함께 앉았다. 영어 사용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유유상종이지. 우리는 익숙한 걸 찾기 마련이야. 박사가 말한 것처럼. 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로 널찍이 떨어져서 그들 뒤에 앉았다. (68-69p)

그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하지만 그녀는 어떤 감정이 들긴 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88p)

알렉시스는 가만히 앉아서 먹었다. 그 애는 멍하니 순종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분고분했지만, 냉담했다. 딱히 수동적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아닌 것도 아니었다. 안나는 그 표정을 알아차렸고 충동적으로 공감을 느꼈다. 난 이 여자애를 알아, 안나는 생각했다. 나도 이런 여자애였으니까. (90p)

어떤 눈물은 위로받을 수 없다. 그저 흘려야 할 뿐이다. (99p)

생존하기 위해 나는 자기 파괴적이다. 하지만 심장의 논리는 자체적인 규칙을 따른다. 나는 그가 그립다. 그립다는 이유만으로. (111p)

비밀이 가장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은 탁 트인 장소다. 오이처럼 서늘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보자. 그 비밀이 무엇이든, 모든 이들은 보이는 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을 받아들일 것이다. 남아메리카로 도망가서 조용한 순응 속에서 살아간 그 나치 간부를 생각해 보라. 그의 말년은 착실하고 흠 하나 없었다. 아침이면 깨어나고, 일어나서, 탁 트인 하루를 향해 걸어간다. 편지를 부치고, 버스를 타고, 시장에서 배를 산다. 야외 카페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는 커피는 블랙으로 마시고 항상 스포츠 경기 결과부터 읽는다.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모자를 들어 인사한다.
70년 전에 그가 군홧발로 바르샤바의 랍비 갈비뼈를 부러뜨린 적 있음을, 지금 찬 시곗줄은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의 문 안에서 집시 마부의 덜커덕거리는 손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7p)

「독일어에서는 <……해지다>라는 뜻의 동사 werden으로 수동태를 만들 수 있죠. 그래서 자전거는 훔쳐진다고 표현할 수 있죠. 아니면 여자가 슬퍼진다처럼.」
아니면, 몸이 황폐해질 수도 있겠지. 그리고 심장이 부서질 수도 있고. 어쨌든 이런 식이 안나에겐 이해가 더 쉬웠다. <……이다>는 정적이었다. <……해지다>는 동작을 내포했다. 무기력한 항복으로 향하는 모순적인 움직임.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가 그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일이 내게 행해지는 것이다. 수동성passivity과 정열passion은 시작은 비슷하다. 다른 것은 어떻게 끝나는가일 뿐이다. (129p)

9월의 끝이 불확실했던 것만큼, 10월의 시작은 편안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 모든 달은 자기 나름의 시작으로 시작한다. (149p)

그 누구도 항상 차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안나는 알았다. 그래도 안나는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나눠 주어서는 안 되는 짐이 있는 거야. 그런 식으로 안나는 전보다 더 외로워졌다. (152p)

「브루노.」 그녀는 속삭였다. 「고통의 목적이 뭐지?」
「이거 무슨 베갯머리 잡담이야?」 브루노는 하품했다. 「잠이나 자, 안나.」 안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녀는 알고 싶었다. 브루노는 몇 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대답했다. 안나는 남편이 잠에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지.」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사라져 있었다. 「그게 바로 고통의 목적이야.」 메설리 박사가 준 대답보다 더 만족스러운 답이었다.
「브루노.」 안나는 밀어붙였다. 「나를 사랑해?」 그는 안나의 질문에 코 고는 소리로 대답했다. (188p)

하지만 하찮은 멍이라도 손가락으로 찌르면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199p)

그들은 탁 트인 공기 속에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어. 우리는 타자성이라는 상자 속에 갇혀 있지. 거기엔 구분선이 있어.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참아 주지만, 결코 환영하지 않아. (221p)

안나는 원래 탐험심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무척 원할히 진행되고 있었고, 행복은 그럴듯해 보이진 않는다고 해도 존재할 것 같기는 했다. 한 사람이 자기 한계를 넘어선 때가 있다면, 말 그대로 그 사람이 어떤 경계를 넘어서 이동한 때가 아니겠는가. (234p)

가장 자주 사용되는 독일어 동사 다섯 개는 모두 불규칙 동사이다. 동사 활용이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가지다, 해야 한다, 원하다, 가다, 있다. 소유, 의무, 갈망, 도주, 존재. 모두 개념이다. 그리고 불규칙적이다. 이 동사들은 불충분의 총합이다. 삶은 상실이다. 잦은, 일상적인 상실. 상실 또한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암기함으로써만 살아 남을 수 있다. (255p)

주위에 벽을 치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친밀감이라는 위험과 사랑에는 늘 결국 따라오고 마는 피할 수 없는 상실감을 돌아서 갈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걱정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해로운 목적도 있었다. 안나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짓말하고 들키지 않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누구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393p)

전구가 다시 분홍색으로 요동치더니 하얀색, 더 하얀색, 제일 하얀색이 되었다. 안나는 정말로 혼자였다. 그렇게 되도록 조율하고 배치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하지만 거짓말 중에서도 최악의 거짓말은 그녀의 고독이 필연적이라는 것이었다. 의무적이라는 것이었다. 예정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거짓들은 그저 불가사리의 팔일뿐이었다. (393-3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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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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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이나 패션에 유행이 있듯이, 책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유유 출판사의 우리말 공부 시리즈를 비롯해서 이동진 독서법, 유시민 글쓰기 특강 같은 '글쓰기/책읽기'를 다루는 책들이 서점 매대에 많이 올라온다. 온라인 서점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이 책은 2015년에 북바이북에서 출판된 책으로, 서평을 써야하는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글쓰기 책들이 유행하면서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같이 소개가 되어 빌려 보게 되었다. 부제는 '생각 정리의 기술'인데,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남는 게 없다는 이들에게 독서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선 이 책은 왜 서평을 써야하는가를 묻고 답한다. 책을 덮은 후에 이루어지는 '글쓰기'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원에서 독후감과 서평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소개한다. 독후감이 주관적 글쓰기라면 서평은 객관적인 글쓰기인 것. 서평의 시작, 비평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비평이란 객관적 글쓰기이며, 비평 요소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별점은 어떤 기준으로 매기는가 등을 서술한다.

 

 서평에 대한 개념 소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서평 쓰는 법을 소개한다. 발췌(주관적/객관적)-메모-개요-초고-퇴고로 이루어진 서평 쓰는 과정을 하나하나 집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특히, 서평 쓰기의 마지막 과정인 퇴고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글쓰기 초보자들은 초고를 쓰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숙련된 이들은 퇴고 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법이란다.

 

 마지막으로 서평 쓰는 이들에게 묻고 답하는 단원이 이어진다. 몇 명의 서평가들이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소 서평을 쓰려고 하는 이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덮고 나면 글쓰기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가능한 점이 좋았다. 실천을 망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나)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또,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 그런지 구성과 문장력이 모두 좋아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 특히 강의노트를 그대로 옮겨 놓은 말투는 거부감 없이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어 좋았다.

생각이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태입니다. 글이나 말로 구체화하기 전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5p)

독후감은 일기나 에세이에 가깝지만, 서평은 비평에 속하므로 보다 명쾌해야 합니다. 쓰는 사람의 입장이 분명해야 독자에게도 쉽게 와 닿겠죠. 먼저 (1)어떤 책을 (2)어떻게 읽었고, (3)왜 추천하는지, 이 세 꼭짓점을 정리했다면 서평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15p)

서평을 쓰다 보면 책 읽은 경로가 뚜렷해집니다. "재미있었다" "감동적이다" "지루하다"라는 감상 한마디가 A4용지 한두 장 분량으로 확장되려면 감정의 정체를 추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16-17p)

주입식 교육, 인터넷에서의 편의적 읽기에 길들여진 성인에게 주체적 공부와 글쓰기는 거쳐야 할 숙제입니다. (22p)

서평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일단 책을 읽을 때 태도부터 달라집니다. 좀더 집중하고,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밑줄을 긋고, 나중에 정리하고 싶은 내용을 메모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게 되면 독해력도 좋아지게 됩니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고, 나아가 비평적 시각으로 꼼꼼하게 책을 읽게 됩니다. 주관적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객관적인 서평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지요. (79p)

프랑스 시인이자 작가인 폴 발레리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작품을 종결 짓게 만드는 건 항상 피로나 만족감, 원고 제출 마감일, 혹은 죽음 등과 같은 외적인 요인 때문이지 작품 자체의 속성이 종결되는 건 아니다. 문학작품이란 작가가 내면의 지속적인 변화를 꾸준히 반영하는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 <글쓰기의 기쁨>(롤프-베른하르트 에리히 지음)에서 재인용 (1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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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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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제주도까지 가서 사온 책. 유유에서 나온 우리말 공부책 시리즈 중 하나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직업이라면, 편집자는 작가가 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요즈음은 오며가며 어깨 너머로 편집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와 출판사가 어떤 체계로 작동되는지를 스을쩍 보고 있는데, 책을 보니 문득문득 와 닿는 부분들이 있다.

 

책의 부제는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블로그에 아무렇게나 싸지르는 글들이 몹시 부끄러워지고.. 이렇게 쓰면 안될 것 같고.. 맞춤법도 더 신경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단순히 교정 교열지만 죽 나열해놓고 어려운 우리말 문법을 설명한 게 아니라, 중간 중간 개인이 쓰는 문장 자체에 대한 고민을 소설 형식으로 끼어 놓아 읽기에 훨씬 수월하다. 좋은 실용서이지만 작고 가벼운 사이즈에 비해 가격은 좀 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양장본 아님. 203쪽. 12,000원)

 

문장 자체의 고민이 무엇인지 예를 좀 들어보자면, '완벽한 문장'이 존재하는지 질문을 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표준 규정에 따라 글을 쓰는데, 국립국어원의 표준 규정이란게 사실 '완벽한' 규칙은 아니니까. 시대에 따라 바뀌고 예외 규정도 많고 사람들이 많이 쓰면 입말이 글말이 되기도 하는 법.

 

교정교열자가 '더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고쳐도, 작가가 자기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고 원래 문장으로 쓰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더 자연스럽다'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이유도 있다. 자기가 쓰는 글에 자부심이 있는 작가라면 더더욱 교정자의 지적질이 불편하게 들릴 터...

 

글쓰기는 참 어렵다. 우리말도 너무 어렵고. 한국어, 모국어가 아니었으면 못 배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습관적으로 선택해서 쓰는 단어와 문장들이 사실 '지적으로 게을러서' 쓰는 것들이라니! 하는 충격과 함께 밑줄 몇 군데.

 

 

좋은 문장은 주로 빼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 편리함이 주는 유혹은 문장이 어색해지는 걸 꾹 참아 내게 할 만큼 크다.

말과 글 또한 합의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라면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치욕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합의된 대로 말하거나 쓰지 않으면 내 생각이나 의도는 물론 느낌조차 표현할 수 없다는 치욕 말입니다.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내가 속한 풍경이기도 하고 내 모습 자체가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내겐 결코 풍경이 될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풍경을 만드는 거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의 시선은 결국 거리를 좁히려는 나의 의지와 당겨지지 않으려는 풍경 사이의 긴장감이 만드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만일 문장이 나를 매혹시킨다면 그건 문장 안에 ‘현재의 나‘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괜스레 심연인 척하지만 실은 허방에 불과한 ‘나‘ 대신 주어와 술어가 만드는 거대한 표면이 문장을 이룰 때 매혹을 느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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