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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이야기는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이 나지만, 당신과 세계가 존재하여 비로소 완성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단편은 <영원한 화자>와 <나는 편의점에 간다>.
영원한 화자에서 드러나는 표현 방식이 너무 좋았다. 몇 번을 읽고 밑줄을 그었다. 필사하고 싶은 단편이었다. 무릇 소설가라면 이 정도의 글은 쓸 줄 알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냉소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저 사람은 허영심이 많은가 그렇지 않은가. 저 사람은 냉소적이고 허영심도 많지만 어쨌든 나를 좋아한단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알기' 전에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하나 가끔은 알 수 없는 쓰다듬에 숨죽이는 사람이다. (114p)
소설 제목에서 유추해낼 수 있듯, 이 단편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영원한 화자'인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영원히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그것도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나 스스로에 그치지 않고, 당신에게로 뻗어나간다.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이, 나아가 세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을 줍고 다니는 사람, 나는 나의 수집가, 나는 나를 찌푸린 눈으로 보는 나에게 가장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말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호프집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상체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조금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내 앞사람이나 옆사람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114-115p)
(“나는 말을 줍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썼을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의 이야기 속 영원한 화자이다. 그러나 인생의 플롯은 대개 '나' 하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화자는 필연적으로 나와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고, 그리하여 재코드화"하는 타자화의 과정을 경험한다. (해설에서 인용)
작가는 이 무한의 타자화 과정을 두서없이 경험하는 자아를 포착해내어 그만의 독특하고 세련되고 중독성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작가가 개인의 내면을 포착해내는 지점도,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모두 맘에 쏙 든 단편이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작가의 섬세한 관찰과 세세한 표현이 눈에 띈다.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가의 상상력이 두려워지기까지 하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두고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친구가 소설을 쓰는 이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 아니냐고 한 적이 있었는데(좀 거친 표현이긴 하다. 하나의 소설이라는 세계가 소설가의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경이롭다는 의미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큐마트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뜻밖에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내 정보들이 매일매일 그가 들고 있는 바코드 검색기에 찍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그는 나의 식성을 안다. 대여섯 종류의 생수 중 내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구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흑미밥과 쌀밥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등을 말이다. (중략) 그는 나의 생리주기를 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생리대를 사가는 나를 본다. 그는 콘돔갑을 뒤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나를 본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46-47p)
이 단편은 편의점을 애용하는, 1인 가구를 대표하는 한 여자의 독백이다. 여자는 여자가 돈을 주고 사는 모든 것이다. 여자는 여자가 편의점에서 구매하는 것들로 설명이 가능하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집이 어디고, 언제 섹스를 하고 언제 생리를 하는지까지, 즉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낱낱이 편의점 포스기에 ‘보고’되는 것이다.
상품 하나하나의 바코드가 찍힐 때마다 여자는 맞은편에서 무표정하게 상품을 하나씩 집어 확인하고 '삑-' 소리를 낸 뒤 내려놓는 점원이 신경 쓰인다. 어쩐지 그의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평가당하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저…… 아시죠?"
그는 도시락을 쥔 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이 근처 사는…… 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랑 사갔었는데……"
청년이 계속 모를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깨끗한나라 화장지랑, 쓰레기봉투는 꼭 10리터짜리만 사가고, 햇반은 흑미밥만 샀는데…… 모르시겠어요?"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취중에 함께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기억해내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50-51p)
실상은 조금 다르다. 나를 보고 있다 생각했던 편의점 직원은 사실 내가 아니라 상품을 보았을 뿐이고, 상품을 통해 이야기되는 나 자신은 상품이 없어진 자리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를 이야기하던 상품이 "어느 분이나 사가"는 흔하디 흔한 상품인 것도 당황스러운데, 상품을 상실한 내가 느낄 당혹감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더 이상 스스로를 설명할 길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그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어디에서였더라? 패밀리마트에서 봤던가? 엘지25에서 봤던가? 어디에서였지? 그러나 나는 그를 기억해낼 수 없다. 다만 어쩌면 그도 나처럼 편의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54p)
결국 매개의 상실은 존재 자체에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어쩌면 그는, 어쩌면 나도, 편의점(매개)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품게 된다. 그런데 이 존재감 상실의 경험이 단순히 ‘인간소외’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투명인간이 된 개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편의점에 가는 여자는 정말 소외된 존재가 아닌 것 같고, 여자가 스스로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연민을 요하는 것이 아닌 것 같기에.
작가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 그러한 글쓰기가 잘 드러난다.
썩 유쾌하지 않은 주제란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이야기 속 화자는 '아버지'라는 자신의 기원을 찾아간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상상하기도 하고(달려라, 아비) 하릴없이 앉아 텔레비전만 보는 아버지의 낡고 하찮은 하반신을 상상하기도 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수족관 안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를 부르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하기도 하며(사랑의 인사) 자신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졸음을 참아가며 듣기도 한다(누가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가).
각각의 소설에서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닥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가족과의 불화를 경험하는 한 개인의 성장소설을 읽다보면 보통 기대하는 바가 있다. '불화를 극복해내거나/불화의 원인을 향한 복수를 통해 더더욱 성숙한 내면을 갖게되는 개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아버지와의 불유쾌한 관계를 경험하는 자녀들이 과연 이를 통해 어떤 통찰력을 얻고 성장해나가는가는 의문이다.
그날 어머니는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채 가만히 누워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생활,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잔디깎이,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해왔던 상상이라 잘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6-27p)
작가는 자녀와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개인의 성장이나 새로운 깨달음, 세계를 이해하는 통찰력 따위는 독자의 상상에 달려있는 모양이다. 이런 방식의 글쓰기(말하기)는 생소하여 흥미로웠다. 특히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를 읽으며 '아, 어쩌면 이 작가는 천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죽은 아버지를 여전히 상상 속에서 유목시키거나(달려라, 아비) 집을 나간 아버지의 부지런했던 하반신을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하여 관계 회복에 실패하기도 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를 향한 필사의 인사는 수족관 유리벽에 가로막히며(사랑의 인사), 아버지가 들려주는 자신의 기원이 그다지 근사한 것이 아님을, 사실 별거 아님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누가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가)
그러니까 소설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관계를 통한 성장이나 통찰이 아닌, 비정상적이고 불유쾌한 관계 자체이다. 가족소설이라고 말하기도, 성장소설이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비뚤어진 모습의 이야기 각각이 생각보다 유쾌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낯선 말하기 방식 뒤에 남겨진 의미를 더 곱씹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해설을 쓴 김동식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스듬한 가족 로망스"라 표현한다.
생물학적 기원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상상은 전형적인 가족 로망스의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가족 로망스의 일반적인 특징인 자기연민에 근거한 복수의 환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중략) 아버지는 나를 가능하게 한 생물학적인 기원이 아니라, 나의 억압된 무의식으부터 연유하는 일종의 징후이다.
생물학적 기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과 관련된 징후로서의 아버지. 이를 두고 아버지와 관련된 새로운 발상법의 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줄곧 부정하던 아버지를 임종과 함께 긍정하게 되는 플롯도 아니고,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 포즈로 윤리적 거점을 마련하는 서사전략도 아니다. (중략) 아버지와 관련된 두 번의 긍정이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즐거운 의지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자기배려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정신적 상처의 기원(아버지)을 유목시키는 독특한 상상력은, 김애란이 보여준 한국문학의 새로운 풍경이기도 하다. (248-249p)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나는 외로워졌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고, 햇빛은 헤어진 애인이 보내온 예의바른 편지처럼 여전히 저쪽 방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예의바름, 그것은 태어나 내가 세상에 대해 느낀 최초의 불쾌였다. (9p)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16p)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 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들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들이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61p)
점프할 때 보이는 동네의 풍경은 순간마다 달랐다. 콩, 하고 뛰어오르면 조금 전 보이던 아저씨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다시 콩, 하고 날아오르면 아까는 없던 여중생이 나타났다. 나는 설핏 보이는 먼 곳, 그 ‘언뜻‘함이 좋아 자꾸 발을 굴렀다. 그러다 언젠가는, 온힘을 다해 뛰어오르며, 두 발이 땅에 닿기 전 내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65p)
그 미소가 하도 해맑아,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런 뒤, 갑자기 형을 그렇게 크게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배신인 것 같았다. (71-72p)
"마음이란 거, 참 이상하지?" 나는 형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배낭여행도 그 사랑과 관련있을 거라고. 우리는 약속한 듯 침묵했다. 나는 그가 내게 어른 대우를 해주는 게 좋았다. 나는 안테나가 가리키는 하늘을 보며,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먼지냄새를 맡으며, 내가 이곳에서 혼자 "나야……" 하고 말하면 저 별 어디에서 누군가 울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75-76p)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79-80p)
그러니 이쯤에서, 한가지 거짓말에 대해 고백해도 좋을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에게 고추를 보여주고 스카이 콩콩을 받았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스카이 콩콩에 올라 콩콩대는 것을 좋아해다. 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스카이 콩콩을 타며 본 것, 혹은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스카이 콩콩의 점프 시간은 그렇게 길지도, 느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스카이 콩콩은 코오오오-옹 하고 뛰어올라 코오오오-옹 하고 착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콩콩‘ 타는 것이었다. 스카이 콩콩에 장착된 스프링의 탄력은 형편없었다. 스카이 콩콩에 오른 뒤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정신없이 콩콩콩콩콩- 거려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자세를 유지하려고 버둥대는 몸짓은 경박하고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스카이 콩콩은 스프링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것은 살면서 누구나 내는 소음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붕- 하고 떠올랐을 때, 가로등이 내게 슬쩍 보내온 윙크는, 거짓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80p)
나는 농담을 좋아하지만 재치있는 사람을 보면 적의를 품는 사람. 나는 때론 돈 만원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이며, 현금지급기 앞에서 항상 뒷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115p)
나는 낯선 이들을 웃기고 난 뒤 안도하는 사람,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은 수난자들의 질문입니다‘라는 알료사의 말에 밑줄 긋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115-116p)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것들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117p)
그러니 어떤 우연들은 11시 11분처럼, 혹은 4시 44분처럼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날 그 시간, 그 칸에 당신이 앉아 있었다는 우연. 순전히 그때 시계를 본 사람의 몫인 행운, 혹은 외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시 11분은 매일 지나가는 시간이므로 우리가 만난 것은 만난 것이 아니다. (120-121p)
다만 그때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아주 작은 것들, 당신이 젓가락을 잡았던 방식이나, 당신이 술안주로 베어물고 내려놓은 오이에 난 이빨자국, 기이하게 생겼던 엄지발가락 모양, 내가 반해버린 남자 배우를 무시할 때 지었던 표정이나, 당신이 조용히 뒤집어주던 삼겹살 색깔 같은 것들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아주 작은 것들 때문이듯.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도 비슷할지 몰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지하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오래전 꼭 지금 같은 날씨에, 꼭 지금 같은 시간에 당신과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며 했던 놀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133p)
그리하여, 한번 더, 그리하여 여전히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136p)
나는 긴 주소지, 나는 제목만 따라 부르는 팝송, 나는 사진처럼 언제나 조금씩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가보다,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이다. 나는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 그러나 무엇에나 쉽게 감탄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 나는 뻔한 사람, 그러나 당신이 뻔하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137p)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138p)
내 꿈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보통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보다 두배는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말이다. (148p)
하지만 그는 한자나 영어를 읽을 줄 몰랐고, 그가 읽는 신문은 대부분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다행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속지 않을 수 있었다. (199p)
나는 하나의 목록이다. 지속적으로 코드화되고 탈코드화되며 재코드화되는 자아이다. 따라서 "나는 아직 잔뜩 남겨진 자"이며, 자기 자신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타자의 영역이다. 그리고 ‘타자로서의 나‘에 의해 세상의 오해 가능성과 아이러니는 문학적 의미의 생산가능성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255p)
생활은 엄청난 에너지를 투여해서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다. 외견상으로는 대도시적 일상성에 대한 섬세한 소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생활감각은 근원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그가 제시하는 대도시의 일상은 관찰자의 눈에 포착된 풍경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자의 감각 바로 그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찰이 아니라 연루의 기록인 것이다. (256p)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의 주인공은 동네에 편의점을 중심으로 일상적인 소비생활을 영위한다. "나처럼 혼자 자취를 하는 사람에겐 일정한 동선, 일정한 습관이 필요하기 떄문이었다." 왠지, 소속 계급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취향의 체계인 아비투스(habitus)와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57p)
나는 없다. 아니, 많은 나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똑같은 생활용품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5갱의 방에서,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일까. 1.5층 단칸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이 속하게 될 계층과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적 취향이 있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실존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또는 과거의 시간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근원적인 실존은 없다. 김애란의 소설에 의하면, 나는 아비투스의 구성물이다. 나는 관찰하는 섬세한 시선으로도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정한 계층의 아비투스로서 공간적으로 발현된다. 나는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관찰의 시선이 갖는 지위는 대단히 압도적이다. 하지만 김애란의 작품들은 관찰자의 시선이 갖는 계급성을 전복적으로 탈은폐한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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