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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사회과학 - 우리 삶과 세상을 읽기 위한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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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어떤 공부를 하나요

 

 인문학이 대세라고들 한다. 기업체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을 열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인문학 강연을 테마로 하는 티비 프로그램도 나왔는데, 요즘 유행이라고 할 만큼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어쩌다 어른, 알쓸신잡 등)

 

 나는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전공한 과는 어떤 대학에서는 사회과학대학 안에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대학에서는 인문대학에 있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수업에서는 사회과학 공부를 하는 것 같고, 또 다른 수업에서는 인문학 공부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과학은 뭐고 인문학은 뭘까. 둘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가? 같은 학과를 나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과학'이 뭔지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있느냐고. 사회과학이 뭔지, 인문학이 뭔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전공 공부부터 시작하는 이 시스템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 열심히 수능 공부해서 대학에 갔더니, 하루아침에 나는 아주 우연히 사과대생이 되어 있었고, 사회과학이 뭔지도 모른 채 쏟아지는 전공 지식만 주워먹기 급급했던 날들.

사회과학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로 사회과학은 인간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을 말합니다. () 우리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고, 그 틀 안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사회과학의 인식과 도구가 필요합니다. 복잡한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이는 힘이 사회과학 공부에 있습니다. 다른 학문이나 도구가 줄 수 없는 기초적인 힘이지요. (19)

 이 책은 경제학자인 우석훈 선생님의 사회과학, 사회과학 방법론에 대한 강연을 모아 엮어낸 것이다. 책은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끝에는 해당 강의를 정리하고 다음 장을 준비할 수 있는 작은 과제(쪽글)가 제시되어 있다. 쪽글 쓰는 과제에 재밌는 주제들이 꽤 있어서 한, 두 개 적어보기도 했다.

 

 전공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특정한 '학문/공식/이론'을 배운다기 보다는, '세상을 보는 틀' 자체를 배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과학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 것 같다.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인식과 도구에 대한 공부가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인 것.

 

 이 책을 이제 막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그리고 나처럼 이제껏 자기 전공의 바탕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는, 사실 고민할 기회가 없었던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헤겔, 사르트르를 비롯한 (왠지 어려울것만 같은) 철학자들과 환원주의, 균질성, 선형과 비선형 같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겁먹은 것과 달리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어렵지 않게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의를 책으로 옮긴 거라 부드러운 말투도 책을 수월히 읽게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책에서 저자는 학문이란 무엇인가(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 vs 백과사전형 지식인), 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책상 앞에서 숙고하는 사람 vs 발로 뛰는 활동가), 그리고 학자가 된 후 현상을 보는 틀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개인 vs 전체) 등의 주제를 다룬다. 현상(사회)을 읽어내는 방식도 연구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단, 이 책에서 저자가 하는 이야기가 모두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보다는 ~가 더 낫다/옳다/바람직하다'는 식으로 단정 짓는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이런 저자의 의견이나 주장에 대한 가치판단은 스스로 내려보면 좋겠다.

헤겔이 Science라고 불렀던 ‘학‘이 요즘과 같이 개별적 학문, 즉 소문자로 시작하고 복수형 접미사 s를 붙이는 sciences로 분화한 것은 불과 1세기 정도밖에 안 됩니다. 개별 분과를 discipline이라고 부르죠. 우리는 이것을 학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개별 학문이야말로 20세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죠. (66쪽)

결국 우리 앞에 인식론적 선택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놓이게 됩니다. 처음 분석을 시작할 때, 구조든 개인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딱 한가운데서 출발하면 될 것 같지만, 그게 곤란하지요. (…) 구조주의와 개인주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108쪽)

이처럼 콘텍스트, 즉 맥락이라는 것이 해석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행위자의 의도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죠. (121쪽)

모두들 자신은 종합적인 시각으로 사려 깊은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실제로 모든 요소를 동시에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죠. (144쪽)

우리가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더우면 땀을 흘려 식히고, 추우면 피부를 떨어서 체온을 높이죠. 이런 시스템이 없으면 체온을 유지하거나, 산소 농도 혹은 이온 농도 같은 걸 맞출 수가 없습니다. 생명체라는 게 아주 복잡해 보이지만, 많은 경우 이런 간단한 시스템으로 기본적인 화학 조건을 유지합니다.
슬프지만, 머리카락에는 이런 네거티브 피드백 시스템이 없습니다. 머리숱이 적어지면 더 많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없는 셈이죠. 머리카락에도 네거티브 피드백 시스템이 있다면 대머리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172-173쪽)

공간을 볼 때는 언제나 그 안에 깃들어 살아야 할 사람들의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집값이 올라가면 집 팔고 이사 갈 사람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그곳에서 삶을 꾸려갈 사람,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묻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 그런 눈을 갖고 볼 수 있어야 하죠. ‘정주권‘이란 바로 그런 개념 아니겠습니까. 사회과학에서 인간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기술적 분석이 될 뿐입니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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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_주의 알마 해시태그 1
박권일 외 지음 / 알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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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출판사의 #해시태그 시리즈는 특정한 키워드를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 책이다. 첫 번째 해시태그는 ‘#혐오_주의라고 한다. 작년 12월에 나온 책인데, 좋아하는 교수님이 강의 교재로 쓰신다기에 친구에게 빌려 읽어보게 되었다.

 

'혐오'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총 다섯 분의 짧은 글들을 묶어낸 아주 얇고 가벼운 책. 책 사이즈 자체도 별로 크지 않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만 담아내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혐오, 여성혐오 등을 문화적 시각으로 읽어내고, 이러한 혐오표현의 법적 처벌 문제에 대해서까지 다룬다.

 

나는 <순수함에의 의지와 정치혐오><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특히 위근우 기자님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글투가 맘에 쏙 들었다. 아마 정치혐오는 시의성 있는 문제고, 여성혐오는 저에게 있어 실제로 피부에 와닿는 문제라 재밌게 읽혔나보다.

 

'딸바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은연중의 권위와 혐오에 대해 읽었을 때에는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자고 만들어 놓은 예능프로그램들을 보며 나만 웃지 못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불편함의 원인도 알게 되었다.

 

오늘은 발췌 중심의 리뷰로, 발췌는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적동하는가>에서 주로 가져왔다.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나가다 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촛불화 과정은 모든 정치적 참여가 촛불집회와 같은 패배에 직면할 것이라는 저주가 아니다. 차라리 압도적 스펙터클과 열광 앞에 불가능할 것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시민의 힘이 너무나 쉽게 좌절되고 무시된 상황이 만들어낸 깊은 상처와 패배감을 말한다. 그럼에도 촛불집회라는 집회의 이데아, 즉 비폭력-평화집회의 추구와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라는 ‘절대선‘의 가치가 만들어낸 역할 사이에서 주저하며 스스로 고립되는 반복적 실패와 그것의 내면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촛불이 이룩한 모종의 성공과 실패가 시민사회의 곳곳에 상속되어 2008년 이후의 정치혐오를 잉태했다. 촛불화 과정은 행위자의 합리성과 순수성, 그리고 정의감에 기댐으로써 정치의 본질, 즉 대화와 타협을 통한 최적의 이익 재분배라는 원칙 자체를 부정하며 대의정치의 원칙이 설 자리를 몰수했다.

이때 일베 이용자들이 말하는 평범함이란, 평범함이 불가능해진 사회라는 역설을 표상한다. 평범함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어,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살고" "평화롭게, 사회에서 튀지는 않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회구한다. ‘평범한 사회구성원‘인 한국의 남성 시민은 자체로 가부장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구축하는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평범함을 향한 일베 이용자들의 열망은 산업화 이래 국가가 산출해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국민상을 투영하고 있다.

<아빠 어디가> 시즌1에는 한 명의 여자 아이에 네 명의 남자 아이가 출연한다. 프로그램은 똑똑한 오빠인 김민국과 친구 같은 오빠 후, 잘생긴 오빠 준, 장난꾸러기 동생 준수 등 각 남자 아이들과 로맨스 관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이성애 중심주의적 구도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매우 맹목적인 독점 관계로 이어진다.

<아빠 어디가> 시즌1에서 아들과 함께 출연한 성동일은 부모와 일찍 헤어져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이 시대의 가장‘을 연기했다. 아들과의 사이에서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전통적 아버지상을 구현하던 그는 ‘장남‘인 일곱 살 아들에게 자신이 없으면 어머니와 여동생은 모두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남성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보호자로서의 과업이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시즌2에 함께 출연한 다섯 살 딸에게는 "여자답게 굴어라" "조신하게 앉아라" "여자애가 그게 뭐냐"는 말을 반복한다. 프로그램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딸바보‘로 포장하면서 씩씩한 어린아이에게 ‘여성‘의 젠더를 부여한다.

아내가 앉았던 자리에 딸을 앉히고 아내와 먹었던 음식을 먹고 아내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면서 아버지는 아내를 딸로 대체한다. 이 장면은 성동일이 딸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날로 기록되며 감동적으로 채색된다. 그러나 여기서 딸은 아내를 대신하여 성애화된다.
이처럼 딸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로 정체화되고, 이는 성인인 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이 방송에서 아버지와 딸은 ‘데이트‘를 반복하며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중심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구미에 맞추는 딸의 모습이다.

송재숙은 한국사회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코드화하는 방식에 대해 분석하면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미성년으로 취급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의 아래로 들어간다. ‘미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에서 ‘딸바보‘를 부모의 ‘사랑‘으로 유통시키는 것은 여성의 유아화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딸바보‘나 ‘사랑꾼‘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즉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비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아버지가 딸을 보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로서의 아버지를 강조함으로써 국가는 시민을 정치경제적으로 보호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따라서 보호하는 남성성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여성은 보호받은 적이 없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소라넷 문제를 묘사한다는 건, 의도가 무엇이든 소라넷에서 벌어진 강간 모의와 리벤지 포르노 공유가 여성에게 얼마나 공포인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이것이 소라넷에 대한 경계의 의도로 읽히길 바란다면, 그게 무능이다. 농촌 청년 기사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비혼이 늘어난다는 것과 농촌 총각이 결혼을 못 한다는 것, 두 개 팩트의 시간적인 인접성을 논리적 인과로 이해 혹은 포장했다가 벌어진 참사다. 비윤리적이기 이전에 비논리적이며, 악의적이기 이전에 못쓴 기사다.

‘개저씨‘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냐는 문제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언어로 이 질서에 균열을 내는 건 그래서 유의미하다. 갓 입사한 젊은 여성처럼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만한 대상만 골라 한 줌 권력을 행사하는 건, 남자다움도 뭣도 아닌 그냥 개 같은 거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을, 두려움의 시선이 아닌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기울어진 질서는 아주 조금 균형을 맞춘다. (…) 그러니 지금, ‘개저씨‘라는 말에 세상이 무너져라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개저씨‘라는 표현이 사라질 미래를 향한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니까.

매우 많은 경우 포르노그래피 유무는 노출이 아닌 시선을 통해 결정된다. 해당 앵글이 드러내는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훑는 철저히 남성중심적인 시선이다. 시선은 권력이다.

불미스러운 일을 통해서야 배움을 얻는 건 슬픈 일이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면 화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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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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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맨부커 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로 유명한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2011년 작이다. 한창 <채식주의자>가 인기를 끌던 시기, 인터넷으로 책 주문했을 때 끼워팔기를 위해 요 작품의 트레일러를 담은 작은 소책자가 왔었다. 그 때 찜해두고 있다가 며칠 전 생각이 나서 전자책으로 빌려 후다닥 읽게 된 책이다.


친절하지 않은 소설

 소설을 읽을 때 마음속에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늘 검정색 옷을 입는 여자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중년의 남성. 상상 속 모습은 내가 아는 사람의 모습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부연설명 없이 훅 들어오는 도입부, 불규칙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매 장을 읽을 때마다 누구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화자는 누구고, 화자가 지칭하는 ''라는 대상은 누구인지. 불쑥 과거의 일을 상기했다가도 어느덧 현재로 다시 돌아와 있기도 한다. 읽다보니 문득, ', 나 지금 주인공 이름도 모르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더이다. 참 불친절하다.

 

 작가가 포착하는 특유의 감각적인 장면들과 문장들이 아주 많이 등장한다. 나처럼 예쁜 문장에 밑줄 긋기 좋아하시는 사람들은 읽는 내내 즐거울 테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 라인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울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집중력 잃기 쉬운 소설. 나무의 뿌리부터 차근차근 큰 줄기를 따라가는 소설이라기보다, 그 나무의 곁가지만 대뜸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소통하 - 지 못하 - 는 사람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자, 그리고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등장한다. 두 남녀는 애초부터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말 하지 못하는 여자와 보지 못하는 남자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한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언어'라는 틀 안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들은 크게 이미지와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미지는 지금껏 내가 경험한 것에 한정되고, 텍스트는 나의 언어(모국어)에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면, 다르게 사고하지 않을까? 소설은 이러한 언어와 사고의 관계성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그럼 언어를 잃은 여자는 어떻게 사고하는 걸까?' 라는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절된 언어와 그로 인해 분절된 사고 속에서, 그녀는 과연 사고를 넘어 소통할 수 있을까.

 

 남자는 청소년 시절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가게 된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 절반은 모국어의 세계에서, 다른 절반은 외국어(독일어)의 세계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전병으로 그는 시력을 서서히 잃어간다. 보지 못하게 될 그에게 그래서 언어는 더욱 중요하다. 말하고 듣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될 테니까.

 

그리고 언어 그 자체

 고어는 현대어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구조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말은 상대적으로 쉬운 문법을 지닌 언어들인 셈.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주어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 어순을 지킬 필요조차 없다. 삼인칭의 한 남자가 주체이며, 언젠가 한번 일어난 일임을 나타내는 완료시제를 쓴, 중간태에 따라 변화된 이 한 단어에 '그는 언젠가 자신을 죽이려 한 적이 있다'는 의미가 압축돼 있다.

 희랍어에는 '중간태'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능동과 수동의 중간 쯤이라고 보면 될까. 동사를 중간태로 쓰면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의미가 된다. '말하다'를 중간태로 쓰면 '내가 한 말이 결국 내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봅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구두를 벗지 않은 채 그녀는 현관 턱에 걸터앉는다. 두툼한 희랍어 교본과 사전, 공책과 납작한 필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란 빛이 도는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린다. 어두워지자 그녀는 눈을 뜬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말을 잃고 나자 그 모든 풍경이 조각조각의 선명한 파편이 되었다. 만화경 속에서 끝끝내 침묵하던, 무수한 차가운 꽃잎같이 일제히 무늬를 바꾸던 색종이들처럼.

밤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는 말도 없고 빛도 없다. 모든 것이 펄펄 내리는 눈에 덮여 있다. 얼다가 부서진 시간 같은 눈이 끝없이 그녀의 굳은 몸 위로 쌓인다. 곁에 누운 아이는 없다. 싸늘한 침대 가장자리에 꼼짝 않고 누워, 수차례 꿈을 일으켜 그녀는 아이의 따뜻한 눈꺼풀에 입맞춘다.

사춘기 때, 저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게 미소였어요. 쾌활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언제든 웃고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저에게는 힘들었어요. 때로는 웃고 인사하는 일이 무슨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의 형식적인 미소를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었어요. 그럴 땐 무술에 능한 동양의 불량배로 보일 것을 감수하며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호주머니에 두 주먹을 찔러넣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뚝뚝한 표정으로 걷곤 했어요.

......내 말이 들리나요?

......거기서, 듣고 있나요?

어두운 것과 더 어두운 것을 구별하려 그는 애쓴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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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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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 우선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종교는 없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리고 이 작가의 글을 좋아해서 책을 볼 때 좀 더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비종교인을 위한 종교 지침서

 종교가 없는 이들은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학교에서 종교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면서, 천주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떼제공동체에 대해 연구하느라 떼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떼제는 교리나 분파를 초월하여 모든 청년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하며 함께 기도하고 노래한다고 한다. 떼제의 수사님 한 분이 한국에 오셔서 화곡동에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두셨더란다떼제공동체는 공지영의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에도 소개되는데, 처음 떼제에 접근할 때 이 책을 읽었었다.

  

 그 날은 비가 왔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곡동은 난생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이었고, 함께 화곡동을 찾았던 조원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었으며, 또 다른 조원은 약속 당일 파토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찾아간 화곡동 모임 장소는 비좁았다. 어두운 실내에 촛불이 은은했고, 비오는 날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스산하기까지 했다. 나는 비종교인이 으레 어느 정도씩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특유의 거부감을 갖고 수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모임에도 참여했다. 처음 배운 노래도 함께 부르게 되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참 이상스런 경험이었다.

 

 종교라는 게, 좀 더 크게 말해 믿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한다고 한다. 때로는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능케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터무니없게 느껴지는 것들이 종교라는 이름 아래서 종종 목격되기도 하고.

 

 작가는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에게 종교(주로 기독교를 이야기하지만 이슬람, 불교, 천주교 등 전 종교를 다 아울러)를 보는 시각을 새로이 제시한다. 종교가 제시한 공동체, 교육, 친절 등의 관점이 어떻게 비종교인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지, 미술, 건축, 제도 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종합적으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종교의 어떤 지점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새롭고 재미있는 시각이었다.

 


우리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도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그만 간과하고 있다. 즉 우리는 책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책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곧잘 속독을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곤 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 종종 그랬는데, 긴 지문을 순식간에 읽어버리고 얼른 문제를 풀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읽는 것''이해하며 읽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건 조금 나중의 일.

 

 매 해 1월이 되면 새해 다짐을 몇 가지 정해두곤 한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갔던 것이 'XX권 이상 독서하기' 였는데, 무조건 양으로 승부하려 하다가 지쳤던 기억이 난다. 올 해는 평소 소설이나 시 분야만 편독하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책을 골고루 읽는 것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는 중이다. 절대적인 양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



토니는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지극히 당연한 사실, 즉 우리 모두가 숨을 쉰다는 사실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아나파나사티 - 호흡의 인식 - 명상에 숙달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존재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 심지어 호흡을 세 번 하는 사이에도 걱정에서 벗어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극히 당연하게 행하는 일들을 의식하는 순간 괜히 어색해지는 때가 있다. 어떻게 숨 쉬고 있는가? 혀는 어느 위치에 두고 있고? 눈은 얼마에 한번씩 깜빡이는가? 라고 물어보면, 그 즉시 수동 숨쉬기, 수동 혀 움직이기, 수동 눈 깜빡이기를 하게 되는 법이다.ㅎㅎㅎ

 

 평소에는 늘 당연히 여겼던 사소한 것들이, 집중하고 의식하는 순간 당연히지 않게 된다. 삶에서 어떤 때에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봐야하는 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도 생각보다 더 자주, 종종.



우리의 필수품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것들(샴푸와 모이스처 로션, 파스타 소스와 선글라스 등)을 위해서는 최상급 브랜드가 대기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외로운 개인의 비조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관심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세계의 이상하고 유감스러운 특징이다.

 작가는 종교가 개개인의 영혼을 섬세하게 신경쓰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임을 지적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의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들 말하는데,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다. 나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거나 먹거나 영화를 보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게 아니라 '유예'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이게 결국 몸에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화장품, 음식, , 가구, 하물며 필기구 하나에도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내 영혼, 정신, 육체는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 이것들을 위해 어떤 브랜드가 준비되어 있는지 - 돌아보게 된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책 + 그럼에도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이어서 좋았다.


우리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도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그만 간과하고 있다. 즉 우리는 책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책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

토니는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지극히 당연한 사실, 즉 우리 모두가 숨을 쉰다는 사실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아나파나사티 - 호흡의 인식 - 명상에 숙달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존재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 심지어 호흡을 세 번 하는 사이에도 걱정에서 벗어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의 필수품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것들(샴푸와 모이스처 로션, 파스타 소스와 선글라스 등)을 위해서는 최상급 브랜드가 대기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외로운 개인의 비조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관심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세계의 이상하고 유감스러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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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의 정치학 - 아주 평범한 몸의 일을 금기로 만든 인류의 역사
박이은실 지음 / 동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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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바빴던 지난 달 한달 내내 찔끔찔끔 읽다가 드디어 마지막 장을 덮게 된 책 <월경의 정치학>. 이 책은 박이은실 선생님이 '월경'을 주제로 쓰신 한 편의 기술지 정도로 이해하면 되려나? 필드는 말레이시아이고, 이 전에 영어로 된 책을 쓰셨는데 기회가 닿아 모국어로도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선생님의 연구 보고서이기도 한지라 책장이 저절로 넘어간다거나 글이 술술 잘 읽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읽는데 더 오래걸림...) 그렇다고 엄청 학술적이고 어려운 책도 아니기에 대중적으로 권할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월경에 대해 이렇게 공론화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점이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내 여친은 질에 힘줘서 생리 참던데?', '생리는 밖에서 참다가 집에 와서 하는거 아니야?'와 같은 무식이 통통 튀는 말들이 2017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여알못' '생알못'은 자랑이 아닌 것을... 이런 기초적인 상식조차 부족한 지경인 사람들이 월경 속에 숨겨진 문화적 맥락을 과연 읽을 수 있는가 싶지만, 어쨋든 이 책은 월경이라는 주제를 꺼내어 도마 위에 올려 낱낱이 분해해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한 일간지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1991년 조사에서 보면 이미 십대부터 오십 대까지 월경 인구의 87.4퍼센트가 일회용 생리대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중 십 대의 일회용 생리대 사용률은 백퍼센트였다. 월경 인구는 일생의 팔분의 일을 생리대와 함께 보내고 일생동안 약 일만이천여 개의 생리대를 소비하며 한국의 월경 인구는 이를 위해 평생 약 6384000원 정도를 지출한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여학생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사용했다는 일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 벌써 일 년 전이다. 대부분의 월경 인구는 인생의 8분의 1을 생리대와 보낸다고 한다. 인구의 절반이 생리를 경험한다고 할 때, 지금처럼 월경을 쉬쉬하는 분위기는 가히 기형적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월경이 가지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와 그 의미가 만들어진 맥락을 지적한다. 비록 주요 연구 필드가 말레이시아이긴 하지만 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꾸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필자가 지적하는 부분은 월경이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지배층(주로 남성)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취사선택되어 소비된다는 점이다. 때때로 생리는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라 종교의식에의 참여마저 제한되지만, 동시에 매우 신성하고 고귀한 것으로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 인권이 높은 나라에서는 생리에 대한 양가적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남성이 이를 취사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생리컵이라는 새로운 생리대가 시장에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관련 기사 댓글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고 이 한심한 댓글들의 원인은 여성의 신체와 월경에 대한 무지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몸을 지나치게 신성화/객체화하고 그에 대한 환상을 점철하여 '숨겨야 하는 것' 처럼 묘사하는 우리네 문화와 교육이 결국 이렇게 무~~한 인재들을 양성해내는 것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알못은 1도 자랑이 아닌 것)

 

밑줄 몇 군데. 이번 밑줄은 좋은 문장이라기 보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사실들 위주.

몸은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몸이란 무엇보다도 ‘젠더‘ 규범이 구성되고 체화되고 또 발현되는 정치적 현장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몸은 가부장적 사회체계 안에 현존하는 위계적 젠더 구조와 규범, 그리고 젠더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에 주요하게 동원되어 왔다. 여성의 몸은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인식의 근거가 되어 왔고,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관념을 정당화하는 데 쉽게 동원되어 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중과 해방이 갖는 공통분모이며 ‘좋은‘ 사회가 추구해 가야할 길이 아니겠는가.

최초의 난자 배출은 조용히 일어난다. 그것은 최초의 정자 배출이 남자다움이라는 세계에 첫발을 딛는 자랑스러운 경험으로서 사회화되는 사건과는 대조적이다. 첫 월경과 첫 사정은 당사자들에게 주목할 만한 경험이다. 난자와 난자를 둘러싸고 있던 피가 몸 밖으로 배출되는 최초의 경험인 초경은 그것을 겪는 이가 알아야 할 갖가지 제약들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시작된다. 월경은 대체로 뿌듯하거나 흐뭇한 혹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경험되도록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어권 서구 문화에서 월경은 심지어 ‘저주‘라고 불리어 왔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문화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완경을 할 때까지 이 여성은 월경 중에는 절대 기도를 하지 않았고 절이나 묘지 등 소위 성스러운 장소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이 여성이 원망한 것은 월경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월경을 하고 있던 자신이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공적인 비난을 듣기 전에 스스로가 월경혈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을 창피하고 불쾌한 일로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월경혈을 내보이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카우르의 사진이 문화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인스타그램의 대응 또한 다분히 정치성을 띄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일회용 생리대의 등장과 판매 경쟁과 함께 등장한 다양한 광고는 신문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전파를 통해 내보내졌다. 1979년 한 일간지에는 이를 불평하는 투고가 실리는데 반드시 이런 분위기 때문은 아니지만 1980년 9월 방송윤리위원회의 규제 조치로 생리대 전파광고는 금지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뒤인 1995년이 되어서야 금지조치가 해제된다.

일회용 생리대 광고는 발달된 기술과 제조과정에 힘입어 만들어진 제품의 기능을 내세우면서도 한편에서는 당대의 남성들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철저하게 따르고 반영하는 전략으로 변천해 왔다. 1997년 금융 위기의 한국사회에 정리해고 바람이 세찼을 때 해고 첫 순위에 오른 이들은 다름 아닌 여성들, 그것도 배우자와 함께 같은 기업에 고용된 여성들이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생리대 광고에서 1970년대 초에 강조되었던 자유, 해방, 활동성 등의 이미지나 1990년대 초에 P&G 등에서 전면에 내세웠던 전문여성의 이미지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순수‘, ‘청순‘, ‘깨끗한‘, ‘하얀‘ 등의 이미지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런데 일회용 생리대의 상당수가 생리통과 자궁건조증, 피부병 등을 유발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거론되지 않는다. 월경혈 냄새를 고약하게 만드는 원인도 월경혈 자체에 있기 보다는 생리대에 들어 있는 화학성분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도 공론화되지 않는다. 탐폰의 경우처럼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위험한 독성 물질이 착용 시 질 내부에서 만들어져 상당수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어왔다는 사실도 특별한 기회가 되지 않으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다른 일회용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용한 일회용 생리대가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 차곡차곡 지구상에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대부분의 여성들조차 일상생활에서 실감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대안생리대가 활동을 많이 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불편한 점이 없지 않기 때문에 활동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대안생리대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회용 생리대가 월경과 월경하는 몸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지, 월경하는 몸들이 살아가는 지구라는 환경과는 어떤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의식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월경과 월경하는 몸에 대한 시각이야말로 오랫동안 월경하는 사람들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고 통제해 온 장본인인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미미한 사회에서는 양가성을 전략으로 취해야 할 필요 자체가 없다. 월경은 그냥 월경으로서 존재할 뿐 그것에 어떤 구구절절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월경이 순수한 것이라거나 불순한 것이라는 식의 어떤 특정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면, 여사제는 월경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든지 어떤 의식이든 거행할 수 있고 또한 초자연적 존재와도 언제든지 접신할 수 있다. 월경을 한다고 무엇을 더 할 수 있다거나 무엇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월경을 하던 하지 않던 해야 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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