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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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다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염세주의자였던 샹포르는 그런 문제를 넌지시 드러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멍청하고 허약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이책 156P


나의 가치관이 분명하면, 부딪힘이 발생한다. 내가 아는 것이 이런데, 그것과 다르면 피곤해지니까. 내가 아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게 합리적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대해주었으면 싶다. 최근 친구들과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라 그때의 미성숙한 행동을 서로끼리는 이해해주리라며 할 때면, 나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그래서 조금은 둥글게 살려고, 내게만 피해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단톡방에서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음란물을 공유할 때 나는 그 방을 나와버렸다. 정확히 차분하게 문제를 직시하면 감정만 나빠지니까. 인권에 대해 얘기한들 가식이라며 뭐 그리 불편하냐며 듣지도 않을 테니까.




예술가들이 이런 갈망을 늘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스스로 그런 갈망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 종이책 164P


예술은 미세한 선을 발견하고 그 선을 파고드는 데 있다. 그 선 사이에서 도덕과 감정을 논하는 것. 예술은 마냥 방탕해도 용서되는 것이 아닌 규율과 자유 사이를 제시하는 것. 그것으로 내 삶과 주변을 비평하는 것.




질문


힘으로 보호해주거나 식량을 조달해주어 원하는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안전이 문제가 될 때는)고대 스파르타, 12세기 유럽) 용기 있는 투사나 말을 탄 기사가 존경을 받는다. 재빠른 동물의 고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공동체에게는(아마존 지역) 재규어를 죽이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더불어 그 상징인 아르마딜로 허리띠를 얻는다. 교역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기업가와 과학자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현대의 구미 지역).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지 못하는 집단은 지위를 잃게 된다. 안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의 근육질 남자들이나 정착을 한 농업 사회의 재규어 사냥꾼들의 운명이 그런 경우다.

어떤 집단은 선한 태도, 신체적 재능, 예술적 솜씨, 지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도 있다. - 종이책 226P


1) 한국의 과거와 지금의 한국에서는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했고, 필요할까? 앞으로는 또 어떤 능력이 필요하게 될까? 높은 학업 점수와 비판적이기보다 복종하는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요즘 보면 연예인이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대두되는 걸 보니 이목을 끌고 웃음을 주는 능력이 앞으로의 높은 지위를 얻는데 절실한 능력이 되지 않을까? 공감하고 빠르게 적용하는 능력?


2) 지위가 없다면 자존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자존감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운동을 생각해봤지만, 우울하면 운동조차 하기 싫고 억지로 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현실 문제에 직면하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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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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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페미니즘에 관련된 페이스북의 글들과 인터뷰 기사 등을 통해서만 접했다. 나는 성향이 섬세한 편이라서 예민하다는 소릴 들으며 자랐다. 남자치고 예민하다고. 그래서 나는 남자지만 남자들의 거칠고 무례를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는 환경이 달갑지 않았다. 

내가 현재 있는 환경은 섬세한 곳이다. 여성이 다수이고, 섬세하고 사근사근 말하는 남성들이 있는 곳. 그런데도 페미니즘에 관련된 생각들을 읽을 때면 너무 예민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남자니까 어쩔 수 없는 걸까, 싶다가도, 섬세하고 개방적인 내가 이 정도인데, 무뚝뚝하고 둔한 남자들은 얼마나 이해가 안 갈지 상상이 되어 슬퍼졌다. 학교 밖의 공부를 스스로 하려는 사람은 너무나 적으니까.

내가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관련 생각을 적기라도 하면, 나는 남자들로부터 페미니스트가 된다. 나는 페미니즘 에세이를 한 권 읽었을 뿐이다. 페미니스트를 이해해보려 하지만, 소셜미디어상의 글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관련 책을, 접하기 쉬운 에세이부터 집어 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 세상이 규정하는 그들끼리도 서로 싸우는데 진정한 페미니즘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자꾸 틀에 맞춰서 규정하려 하는 걸까. 늘 정답을 원하고 규정하려 하는 건 더는 촌스럽다. 그저 듣자고. 설득하려 하지 말고 서로 얘기를 하자고. 그러다 보면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테니까. 이야기를 들으려는 나의 첫 시도는 이 책인 거고. 


누군가의 부재는 '마땅히' 애도해야 하는 것이 되고, 누군가의 부재는 그렇지 못하다. 매 맞는 아랫집 여자가 당한 폭력은 '그런 남자를 만났거나, 여자도 똑같거나, 여자가 맞을 만했거나'로 해석되며 희석되고, 낙태를 한 여자의 아픔은 '그러게 피임을 잘 했어야 했다, 여자가 자초한 일, 여자가 아니라 죽은 아이가 불쌍하지'라며 폄하된다. 파리 테러의 희생자를 애도했던 많은 사람들은 아프리카·시리아·팔레스타인 등 제 3세계 곳곳의 희생자들에게도 같은 슬픔을 느꼈을까.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함께 아파하지만, 성매매 여성들의 죽음이나 폭력에는 어떨까. 여전히 '자발적 매매춘'이었는지 '강제적 인신매매'였는지는 위안부 문제의 중심 화두가 된다. 설사 '매매춘'이라면 그 폭력은 다르게 해석되는 걸까. -78P


페미니즘은 단 하나 혹은 메갈리아와 메갈리아 아닌 것으로 나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정체성도 페미니스트 혹은 메갈리안으로만 정의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쉽게 "너는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고 있구나"라고 말할 수 없다.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하는 개개인의 페미니즘이 있으며, 페미니스트'들'은 사안에 따라 협력하거나 투쟁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정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페미니스트가 세상의 구원자이거나 천사이거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는 아니니까.

진정한 페미니즘은 없다. 나는 누군가 허락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생각이 없다. 이것은 나도 모르게 가하는 폭력을 성찰하지 않겠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거부이다. 나는 내 존재 자체로 자유로워지고 싶고,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자유롭길 바랄 뿐이다.

추신. 혹시 진정한 페미니즘이 있다고 믿는다면 스스로가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모델이 되어주길 바란다. -111~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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