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렘17장 5절에 사람을 믿는자에 대해 경고합니다
사람은 모두 사랑의 대상일 뿐,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믿음의 대상은, 한분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사람(교주나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인도자)를 믿는것이 왜 어리석은지
에레미아 17:9 에서그 이유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렘17:9)
타락할 가능성, 범죄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녕,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계명"을 교훈삼아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막 7:7)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장로의 유전"이나
"교회 법", 혹은 "사람의 계명"이라고 명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교회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당 건물이나 조직이라는 것이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ecclesia=에클레시아=믿는자들의 모임)
일 뿐이지... 건물이나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결코 장소(Place)가 아니라 항상 사람(People)이며
        결코 우리(Fold)가 아니라, 양(羊,Flock)이며
        결코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의 모임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 바로 당신이 성전이며 교회이지
당신이 기도하는 그 장소가 성전이나 교회가 아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이 교회나 성전이 될 수 없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새계약 이후, 즉 신약시대 이후에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거룩한 곳이란 없다"-John Havlic-


그러기에 교회건물을 건축하면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거나
교회당이 아닌 교회를 건축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연보를 회당건축 용도로 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조직은 비대해지면 부와 권력이 생기고 타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교회사를 볼때 교회타락은 교회당을 크게 짓는것과 맞물려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나 조직이나 건물을 위해 충성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했노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마2:27)
마찬가지로 교회를 위해 성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 개개인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Temple(구약의 성전)과 Church(신약의 교회)는 서로 다르며
Sabbath Day(구약 안식일=토요일)과 Sunday(신약의 주일)도 다르며
Priest(구약의 제사장)와 minister(신약의 목사)는 서로 다르고
Offering(구약의 제물,헌물)과 Donation(신약의 연보)역시 서로 다릅니다.

전혀 다른 두개념을 마치 같은 것인냥, 위상을 높이려해서는 안되며
비슷한 것처럼 혼용하거나 오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구약의 율법중에서 시민법과 제사법은 폐기되었으나
예수께서는 도덕법은 더 강화하셨습니다.(마태복음 5장)
도덕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이미 폐하여진 시민법이나 제사법등을 교회법으로 변형시켜
그것의 준수를 더 중요시하며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며
新율법주의자나, 형식주의자,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게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이용당하면서 하나님께 사용되었다고 믿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기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다.
자기 배를 불리는 일(땅사고 건물증축하는 일등)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서는 안될 것이며..個교회 집단 이기주의와 편의를 위해
더 중요한 이웃 사랑의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나 탐욕이나 야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기독교 역사속에서,정치에서,혹은 전쟁의 합리화를 위해 악용되었으며
자기입지의 정당화시키고 자기 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써왔습니다.
이외에도 교회안에서도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두가지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①하고자 하는 일이 성경에 권장 근거가 있는 일인가?
②근거는 있지만 아전인수격 코걸이로 해석해 욕심을 정당화하지 않았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반드시.. 분별해 나가야하며 (롬12:2) 그래야만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저지 할 수도 있고, 나아가
이단 사설에 속아 영혼을 팔게 되는 비극을 막게 될 것입니다.
누구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교회 밖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조차 속게 되는 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행하는, 열매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버리고
참 진리를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도처에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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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때나 성장할때는
언제나 거창한 꿈, 화려한 꿈을 꿈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부러워할 만한
그런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꿈은 그런 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꿈은
사람들이 놀라게 될 그런 꿈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저 자신이 소스라치게 놀랐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제가 꾸고 싶어서 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꿈꾸던 소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때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보이지 않는 = 영원한 = 사차원의 = 영적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나 보여주시는 비젼은
인간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편에서 시작되어
인간쪽으로 던져진 밧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항구에서 표류하는 배로 던져진 밧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분이 해주시는 약속이나 보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경우나 성경 기록들을 종합해 볼때
쉽게 알수 있는 일관성이나 통일성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인간편에서 큰 꿈을 꾸고..
거창한 비젼을 갖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만 한다면..
그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인간편에서 시작되는 꿈이란..
육적인 일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일지는 모릅니다만,
영적인 일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내 쪽에서 먼저 계획하는 꿈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이루고 싶어서 꾸는 꿈이나.. 계획하는 내 계획이..
내 뜻대로 이루어 질런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러기에 저는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계획된 일들 역시..
그일이 이루어 질지,도중에 실패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에..
영원하신 절대자이시기에..전능자이시기에..
그분의 능력과 판단안에서.. 그분의 통찰과 주관아래서..
그분이 제게 약속해 주신 것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시작하시고 이끌어 주시되, 내가 협력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결심하는 자..
주예수님을 사랑하려고 전심으로 애쓰는 자..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하는 자마다..
그분은 은혜로써..그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꿈과 비젼을 주실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 선한 꿈이 내 속에 소원이 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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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하
미우라 아야코 지음, 이재신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1997년 8월
평점 :
절판


미우라 아야코의 글을 읽으면 좀더 깊어진 나를 발견 한다. 평범한 일상의 본질을 꾀뚤는 힘이 작가에게 있는듯 하다.

"빙점"또한 "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나에게 던져 주었다.

 물론, 그 물음에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지만, 고뇌를 통한 삶의 충만함을 느끼며,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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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모퉁이에 아주 재미있는 문구로 
사람을 유혹하는 가계가 있었습니다. 
망했다! 망했어! 왕창 세일!
거저 가져가십시오.
"폐업 정리"

전 저렴한 옷을 자주 입기에
세일이라는 양복점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혹시 괜찮은 옷이 있을까 해서...

그런데 아내는 굳이 만류했습니다. 
좋은 옷이 없다고...
아쉽지만 그냥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계는 1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폐업정리는 계속되었습니다
폐업정리를 시작한지가 일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계속 폐업정리 팻말을 붙여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가계 이름은 폐업정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상술이라고
폐업할 마음 없는데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폐업정리라는 가계가
계속 폐업하지 않고 장사를 하는 것이
상술이든지 아님 정리할 것이 많아 선지..
 
어쩌면 정말 팔아서 처분해야 할 것이
너무 너무 많아 처분하고 싶고
끝내고 싶지만 끝내지 못하는 것인 줄도... 

그래서 언제 폐업될지 10년? 20년? 
아니면 주님 오실 때까지?

가계를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 가계와 같다는.. 
우리 역시 "폐업 정리"라고 써붙이고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닐지도... 

마치 오늘 모든 것을 다 정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심없이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받고 움켜쥐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인생을 폐업할 때 재고가 너무나 많이 남아 버리는 
그런 인생이 아닐지를 돌아 봅니다.

어쩜 주님 오실 때까지
오늘을 우리 삶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늘 폐업정리하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인 것처럼 손해 보더라도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을 나누며 
마지막인 것처럼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마지막인 것처럼 우리의 허물은 다 없이하며...

그렇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마지막 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의 폐업정리를 붙여놓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싸구려만 파는 가계로 폐업정리만 하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 가계에도
폐업 정리라는 문구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부들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몇일 후 그곳은 다른 모습으로
간판을 바꾸었습니다.
더 이상 그곳이 싸구려 옷가게 아니라
유명한 메이커 가계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싸구려 같은 물건들이
다 폐업 정리될 때
그때야 우리의 삶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같습니다.

하나 둘 빨리
우리 삶의 싸구려 같은 것들을
팔아 버려야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아 갈수 있을 것같습니다.

폐업정리와 함께
아름다운 개업을 할 수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죽고
그 안에서 다시 사는
삶의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늘 새롭게 살아가고 싶은 
푸른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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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dialogue)와 논쟁(debate)의 차이점을 아세요? 대화는 협력적이며 서로 이해하기위한 시도인 반면에, 논쟁은 적대적이며 서로가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한 시도입니다. 대화는 공통점을 찾는 것이 목적이지만, 논쟁은 승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화는 서로 이해하기위해 경청하고 의미와 동의점을 찾지만, 논쟁은 상대방의 결점들을 발견하고 상대방의 요지를 공격하기 위해 경청합니다. 대화는 참여자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고 확대시키지만, 논쟁은 참여자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려고만 합니다. 대화는 자기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하지만, 논쟁은 다른 사람들의 위치에 대해 비판을 하려고 합니다. 대화는 원래 제시된 해결방법들 보다 더 나은 해결점들을 찾기위한 가능성을 열어 놓지만, 논쟁은 자기자신의 입장을 최선의 해결책으로 믿고 방어하려는 노력이고.. 다른 해결점들을 배타하려는 노력입니다. 대화는 열린 마음의 태도를 요합니다. 즉 나의 입장과 관점이 잘못일 수도 있고 내가 변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항상 열려있는 태도 입니다. 논쟁은 닫힌마음의 태도입니다. 즉 나의 입장과 관점이 확실히 옳다는 태도 입니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혹은 우리가 믿기에 최고의 생각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이 나의 믿음과 신념들을 파괴하기 보다는 도전하고 개선해주는 좋은 도구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논쟁은 나의 생각과 신념이 전적으로 올바른 것임을 입증하고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대화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신념들을 중지하게 하지만, 논쟁은 자신의 신념들을 전체적으로 드러내고 확증하려고 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인 의견일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논쟁을 통해 우리는 명백한 차이점들을 찾으려고 한다. 대화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갖고,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자세를 배제하지만, 논쟁은 다른 사람들을 가치 없게 만들고 비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관계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다. 대화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정답의(the answer) 부분들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지만, 논쟁은 어딘가에 정답이 있고 어느 한 사람이 그 정답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합니다. 대화는 열린 결정(open-ended)으로 남아 있지만, 논쟁은 필연적으로 한 결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가정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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