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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기에
로랑스 타르디외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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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책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부치고 싶어하거나,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하거나.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수는 없다. 그냥 내 기분에 따른 분류니까. ^^;

이 책은 물론, 후자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어서.
내가 멈춰 있었던 어떤 지점에 함께 멈춰 서서 감동하고 싶고,
또 더 나아가, 내가 놓친 부분을 누군가 짚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멈춰 섰다.
좋은 책은 고개를 박고 활자에 집중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꾸만 갈피를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든다.
그렇게 특별한 지점에 멈춰 서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좋은 책이다. 로랑스 타르디외의 책은 나를 오래 멈추게 했다.

어떤 소설에 대해 말할 때, 그 소설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이렇게나 간단하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 그 둘은 아주 오래 전, 아이가 실종되고 난 뒤 그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자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남자는 몇십 년 만에 여자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만난다.
이게 다다. 게다가 이 책은 무척 얇다. 작은 판형에다, 138쪽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주느비에브의 슬픔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주느비에브는 하나뿐인 딸아이를 잃고 난 뒤, 자신의 공책에 이런 문장을 쓴다.


공허와 죽음 그 자체에 익숙해질 것. 매사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울 것. (69쪽)


어떻게 상대방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안다고 생각할 만큼 교만해질 수 있을까? 여기엔 어떤 소유욕이 작용하는 걸까? 


그에게 난 가만 내버려두라고, 또 그의 확신과는 반대로 그의 입장에서는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내 고통에 대해 운운하는 걸 그만두라고, 난 요구했다. 남의 고통을 '상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72쪽)

 
절망이 그들을 꺾기 전,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 뱅상과 주느비에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고통 때문에 침묵 속으로 침잠해버린 두 사람. 삼십 년이 지나 주느비에브는 죽어가고 있고, 뱅상은 마치 "심연에 맞서러 가는 사람처럼" 그녀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죽음이 확실해지고야 딸아이 클라라의 죽음을 마침내 믿게 된 주느비에브는 말한다.

 
왜 삶의 밝은 면만 기억해야 하는 걸까? 빛을 눈부시게 만드는 건 어둠인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끔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클라라를 잃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난 순간의 가치를 몰랐을 거야. 흙과 소소한 것들의 가치, 당신과 내가 함께하는 이 몇 시간의 가치를. 우리의 사랑보다도 강한 우정을 말이지. 슬퍼하지 마, 뱅상.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간다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난 이 순간을 갖게 된 걸 감사해. 영원은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이 속에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주는 현기증 속에 있어. 내가 누구한테 감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죽음이 무언가를 향해 열려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야.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 그렇지? (109쪽)

 

이 둘처럼, 나는 감히, 헤어져 있더라도 서로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관계를 꿈꾼다.
비록 그것이 이 둘처럼, 똑같은 시련을 겪었다는 이유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안의 고통을 휘저어놓아야 하고, 모두가 평안히 잠든 밤의 무질서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런 고통을 함께했던 사람이 아직 건재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더 살아갈 수 있다.


갑자기 내 발아래 땅이 꺼진 날, 당장 내일 아침 만원지하철에 오를 용기를 어디에서 얻어야 하나 막막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런 밤에도, 이런 문장들이 있어주었다면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리라.
빛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될 거라고, 빛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고, 문장이 속삭여준다.
그 앞에서 나는 선뜻이 '그렇다'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내 안에는 아직 많은 빛이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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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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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덜란드 작가가 쓴 소설은 처음 읽는다. 게다가 소설의 화자는 바로 캔버스이다.

그 낯섦을 계속 의식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내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장편소설치고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야기는, 아직 팔리지 않은 캔버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아직 백지의 상태로 누군가에게 팔리길 기다리는 캔버스는 이내 초상화가인 빈센트에게 팔리게 된다. 캔버스는 그를 '창조자'라고 호명한다.

하지만 화자인 캔버스 또한  창조자나 마찬가지다. 

빈센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러 온 스페흐트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페흐트가 의뢰한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스페흐트의 죽은 아들이다. 

 

당신은 당신이 그린 초상화로 한 생명을 구하게 될 겁니다. (60쪽)

 

스페흐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와 아들'일까를 내내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창조자가 스페흐트의 아들인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 그래서 제목이 이거였구나'싶었지만,

소설의 후반부, 싱어의 정체(?)가 드러나면서부터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어느 누구도 아닌 스페흐트 씨로 인해 내가 존재했다.

(…) 스페흐트 씨는 나를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고 싶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보고, 나에게 말함으로써 나를 내 위치에 세워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싱어! 네가 거기 있구나. 이제 너는 더이상 죽은 아이가 아니야. 지금 네가 바로 현재의 모습이야. 이렇게 말해줄 유일한 사람은 스페흐트 씨였다.

나는 이제 정말 철저히 혼자다. 나는 스페흐트 씨가 죽은 다음에는 싱어의 모습을 지닌 캔버스에 불과할 것이다. (165쪽)

 

이 문장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화자인 캔버스 자신이 스페흐트 씨의 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야 나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페흐트'의' 아들>이 아니라 <스페흐트'와' 아들>인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번역된 제목이기 때문에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사람들은 꼭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아빠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206쪽)

나와 스페흐트 씨는 그렇게 몇 분 동안을 계속 앉아 있었다. 스페흐트 씨가 그의 무릎 위에 자신의 아들을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되길 원했던 등이 굽은 사람 위에 있었다. 그것은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떻게 나를 만지지도 않고 손끝으로 내 위를 움직이는지, 위에서 아래로, 찢긴 곳을 따라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의 발끝에서 머리까지 움직이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222쪽)

 

기자인 민커가 싱어의 정체를 밝히면서 스페흐트는 졸지에 변태성욕자가 되었지만 어쩌면 그건 정말로 오직 민커만의 시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게 마련이니까.

(이건 이 소설을 읽어내는 방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말 의미가 풍부한 소설이다. 읽다 보면, 탄생과 죽음, 혹은 예술에 대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 혹은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으므로.)

스페흐트는 정말로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의 싱어를 다시 살려내고 싶었던 스페흐트의 욕망은 기실 세상 모든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창조자는 싱어를 그리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들추어낸다. 바로 테인이라는 친구와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마치 스페흐트와 그의 노예였던 싱어와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보고난 후 창조자의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화자인 캔버스는 싱어이기도 하고 테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스타인이라고 이름 지어진 창조자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창조자가 캔버스를 태우고 난 뒤 그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순환 때문에 마치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묘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테인이었다. 나는 그의 아이였다. 나는 리데베이였고, 민커였다. 나는 그의 앞에 서 있는데도 그가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보호받지 못했고,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지를 봤어야만 했다. (205쪽)

 

 

나라는 초상화 작품은 인간에게 보이기 위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우리 같은 작품보다 죽음 앞에서 더 두려워한다. 나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두려움에 천 개의 두려움을 더하면 바로 그게 인간의 두려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내가 왜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잠시 후에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자신들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가?

스페흐트 씨가 누구였든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창조자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를 살려내라고. (…)

인간들은 자신들이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용해 많은 싱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만들고, 그런 다음에는 죽음처럼 두려워한다. (182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독자는 스페흐트와 싱어 사이의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감정을 포함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바로 이것뿐이다.

'그는 싱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고보니,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사람들은 괴물을 세상에 내놓는다'라는 문장이 씁쓸하게 읽혔다. 나약한 인간 존재의 모습 때문에, 어쩐지 쓸쓸하다.


스페흐트 또한 '단 하나의 불멸성'으로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창조자의 캔버스에 옮겨진 그 많은 모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페흐트의 아내인 리데베이가, 죽은 엄마의 입술자국이 찍혀 있는 컵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라도 자기 안의 사람들이 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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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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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이 나온 걸 작년 겨울쯤 본 것 같은데, 손이 가지 않았다. 철? 자본? 노동? 첫 느낌은 딱 이거였다. 재미없겠다..

김숨이 최근 발표하고 있는 단편들을 따라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단편들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영영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괴하고 강렬한 소설이다.

마치 단편 같다는 인상을 주는 장편이다. 그 정도로 문장이 경제적이다. 그런데도 잘 읽힌다. 뚜렷한 서사가 없는데도. 

후각과 장면을 이미지화 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로 쇠 냄새가 난다.

 

마을 북쪽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마을 남자들은 너도나도 조선소 노동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을 갈구해왔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뿐이었다.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노동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곧 신앙이다.

철선이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그들에겐 변함없는 노동이 주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쇠를 신봉하기 시작한다. 멀쩡한 이를 다 뽑아서 무쇠 틀니를 끼우고, 무쇠 식칼을 수십 개나 사들이고, 쇠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염할 때도 구멍이란 구멍에 모조리 쇠를 박아넣고 쇠로 짠 관 속에 시체를 눕힌다.

마을은 점점 녹으로 가득 차고, 녹은 모든 걸 부식시킨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하다 죽어가고 죽지 않으면 조선소에서 쫓겨나 노동을 박탈당한다. 마을에는 폐병 환자가 늘어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소 노동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만들고 있다는 철선을 보지 못한다.

 

그는 문득 철선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지난 십 년 동안 철선의 완성만을 위해 힘써 일했지만, 그는 꿈에서조차 철선의 실체를 본 적이 없었다. 수십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있는 철판만을 보아왔을 뿐이다. (104쪽)

 

철선뿐 아니라, 조선소의 '주인되는 자'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되는 자'는 오로지 조선소 곳곳에 매달아놓고 근면, 성실, 진보, 지향을 외치는 확성기로 존재할 뿐이다. 이 소름끼치는 진실!

 

 

노동하는 사람들은 김숨의 다른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밤새 수십 마리의 뱀장어를 잡아야 얼마의 돈이나마 벌 수 있는 아버지(「모일, 저녁」), 장장 구만 오천 킬로미터나 달린 중고 트럭으로 밤낮없이 이삿짐을 나르는 아버지와, 독성으로 손가락이 꺼멓게 죽어가도록 혁대에 본드를 붙이는 어머니 (「트럭」), 이십 년을 꼬박 싱크대공장 사장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하다가 교통사고 이후 운전대를 잡지 못해 바위만 타러다니는 아버지(「바위1」).   

소설이 끝나도, 그들의 노동만은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트럭」의 아버지는 자식이 취직을 하고난 뒤에도 자정쯤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삿짐을 나르러 집을 나선다. 그리고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한 큰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어머니는 독성 때문에 환각에 취해 있으면서도 혁대에 본드를 펴바른다.

가족과 저녁을 먹기 위해 소설 내내 생선을 굽던 「모일, 저녁」의 아버지는, 생선을 굽다 말고 소설의 끝에 가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는 뱀장어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온 딸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지겹도록 생선을 굽던 그는 결국 밥도 먹지 못하고 노동하러 사라진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고 말지만, 그의 노동은 새벽 내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삶은, 세습된다.

그건 『철』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들의 아들들 또한 조선소 노동자가 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말한다. "얼른 자라서 조선소 노동자가 되어라."

 

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조선소에서 주어지는 노동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온종일 힘써 노동하면서도 노동에 갈급했다.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선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만 갈구했다. (19쪽)

 

나 또한 종종 노동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

아침 저녁 출퇴근 길에 이 책을 조금씩 읽었다. 일하러 가거나 하룻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이 '안도'였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집 안에만 있었던 일 년여의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이 '죄의식'이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그땐 부러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지나치게 노동하고 있다'는 식의 책만 찾아읽곤 했었다. 사람들에겐 아닌 척 했지만, 아니 나 스스로에게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속도 없고 밥벌이도 못하고 있다는 상황에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사마실 때도,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살 때도 여지없이 죄의식이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내 가족이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자각. 

밥벌이를 하고 있는 지금은 커피 한 잔을 사마실 때마다 다른 이유로 흠칫흠칫 놀란다. 아, 난 이제 이걸 정당하게 사마셔도 되는구나 싶어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과 작가의 말 때문에 출근길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붕 위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북쪽을 향해 목을 빼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철선이 물 위로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지난 삼십사 년 동안 수천의 노동자들이 완성을 위해 매달려온 철선이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들을 태우고 지상낙원으로 데려다주기만을 바랐다. (……) 

"저기, 철선이다!"

그때 누군가 마을이 떠나가도록 소리 질렀고, 지붕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북쪽을 향해 젖은 몸을 일으켰다.

그 누군가 또 "철선이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햇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사람들은 철선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긴장된 침묵에 잠긴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사람들은 저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철선'을 탄식처럼 외쳐댔다. 언젠가 만국박람회장에서처럼, 빛이 한순간 점멸하듯 사라져버릴까 두려워하며…… (259쪽)

 

그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은 정말로 철선을 본 적이 있느냐고.

 

작가의 말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래도 된다면

일개일 뿐인, 세상의 모든 위대한 당신들께 이 소설을 바친다. 라고. 일개. '보잘것없는 한낱'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

나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일개', '위대한 당신들',

그리고, '그래도 된다면'이라는 글자를 눈이 시려질 때까지 쳐다봤다.

 

김숨의 다음 소설이,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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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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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단조롭다고 느껴질수록, 소설을 읽는 일이 더 즐겁다.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세계 그 자체보다는, 자기들이 본 것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좋다.

 

한창훈의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 선 것처럼 멀미가 났다.

표제작인 '나는 여기가 좋다'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평생 "바다 한가운데 몇 뼘 땅일 뿐인 섬과 몇 발자국 나무판자인 배에 떠서 살았던" (33쪽)

천상 뱃사람인 그는 이제 배도 잃고 빚만 떠안은 상태로 늙어버렸다. 설상가상 아내마저 그를 떠나려고 한다.

 

"난 전생에 뭔가 큰 죄를 졌어라우."

그녀는 깊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인가."

"섬에서 태어났응께." (17쪽)

 

나는 섬에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섬에 대해,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걸어도 바다, 뒤로 걸어도 바다, 옆으로 걸어도 바다가 나오는 몇 뼘 땅일 뿐인 섬.

아내는 그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육지로 같이 가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당신은 육지를 무서워하는 것뿐이라고.

배를 팔고 그 배를 보내기 전날,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낚시를 나온 밤. 식구들 한동안 반찬거리라도 할 생각으로 낚은 고기들을 관 덮듯 묶어버린 그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아내를 따라 육지로 나갔을까?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나는 여기가 좋다'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거기서부터 작가의 고집이 느껴진다. 

뒤에 실려 있는 '섬에서 자전거 타기'에는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사내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그는 아내가 떠난 뒤 섬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 두 편을 굳이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았다.

'섬에서 자전거 타기'는 가족과 배를 잃은 선장과 자살하러 섬으로 들어온 한 여자를 등장시켜 그들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나는 여기가 좋다'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생생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도 섬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선전포고한 아내는 남편이 갈치를 낚아올리자 아무렇지 않게 도마와 칼을 집어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손질한다. 나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질긴 근육을 씹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한창훈이라는 소설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바로 '밤눈'이다. 한밤 중에 이 소설을 읽다가 정말 펑펑 울었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내용이나 인물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도 유독 그 공간만이 뚜렷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경우.

하지만 이 소설은 인물과 공간이 잘 섞여들어, 그 인물이 소설 속 공간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 소설은 마치 이인극 같다. 한정된 공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술집에서 한 남자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주인여자는 조곤조곤 사내의 술상대를 해주고 있는 그런 밤, 눈이 내린다. 소리없이 밤눈이 내린다. 주인여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밤눈이 내리는 소설 속 정취가 잘 살아나고 있는 까닭은 이런 문장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사내들이 어지럽게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발자국은 흰 천을 덮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45쪽)

뭔 이야기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으까.

눈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하며 내리는 눈이란 어쩌면 하늘도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 아니겠냐고 괜히 덧붙였다. (60쪽)

 

사실 감동에서 한발자국 빠져나와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고 그 사랑이란 결국 불륜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개인취향을 넘어서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감동이 먼저 왔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도 많이 생각났다. 어쩐지 굴곡많은 그녀들의 이야기는 늘 애잔하다.

 

눈이 따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이랑 있으면서 알었소. 겨울에, 그 사람 품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탄불 갈러 나오면 이런 눈이 내리고 있었소. 그러면 물 흥건한 정지의 노란 탄불이며 잠시 두고 온 그 사람 품이 왜 그리 따시던지. 멍하니 눈 내리는 것 보다가 후다닥 들어가면 그 사람은 내 손에 묻은 물 한 방울 한 방울 일일이 닦아주고, 혀로 핥아주고. 흐흐.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입디다.

그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 (60쪽)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연애에 실패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패한 연애의 반대선상에 성공한 연애가 있다는 말인데, 연애의 성공은 대체 뭘까. 정말 '결혼'이라고 말할 셈인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연애가 모두 실패한 기억으로 남는다는 건가?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연애'는 결혼이 아니었다. 평생가도 잊을 수 없는, 잊을래도 잊히지 않는 사람을 하나 갖는 일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가슴이 많이 아파지는 일이겠지만 문득문득 생각하면 그때가 정말 나에게 빛나는 시절이었구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일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밥 먹고 속이 든든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여자가 말한다.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단 말이요. (61쪽)
 
그렇지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손님 가시기 길 나쁘겄네. 그래도 이런 눈은 춥들 안 한게요. 그럼 안녕히 가시게라우. 그는 술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을 다 읽고나면,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눈은 춥지 않다는데,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듯한 것이라는데, 웃풍 부는 내 방이 춥고 또 책을 들고 있는 손이 너무 시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춥다는 건, 한때 따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작은 온기로 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덥혀야 하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려주는 '바람이 전하는 말'이나 '가장 가벼운 생'을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그랬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어미의 죽음이란, 세상천지에 안길 품이 없어져버렸다는 소리이다. 물론 그녀는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이렇게 울며 안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라서 그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나그네 품속 깊이 갈무리한 금반지 같은 거였다. (121쪽)
 
"난 유산을 딱 하나 받었어. 그것이 뭔지 알어?"
"글쎄요."
"아부지의 죽음이여. 그게 내가 받은 유산이여."
"죽음도 유산이 되는기우?"
"되더먼. 나야 들 배워노니께 조리 있게 말은 못 하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배울 것은 그거 하나뿐인 듯싶은 겨.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말이여, 죽는다는 거, 죽어 읎어진다는 거, 그것 하나로도 교훈이 되더먼." (166쪽)
 
이런 묵직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풍문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손 안에 잡힌다. 죽음이 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서 좋았던 소설들은 대부분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듯싶다.
인물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고, 이야기만이 저 먼 곳까지 가닿아 저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뒤편으로 갈수록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던 소설집이지만, 질기고 단단한 언어가 남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바다냄새를 맡았다. 한창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어쩐지 바다에 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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