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 -하
앤토니어 수잔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미래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의 그림이 책 전반을 설명해 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인 에드워드 번-존즈의 "현혹된 멀린"이 표지 그림인데, 멀린에게서 마법을 배운 비비언이 그 마법을 가지고 그를 영원히 탑에 가두어 버린다는 아서왕 이야기의 전설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비비언이 자신에게 마법을 걸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매혹당해서 계속 마법을 전수해주다가 결국 그녀의 마법에 걸려 영원히 자유를 박탈당하는 멀린.  메두사의 머리를 하고 그의 전부 (마법의 지식 + 신체의 자유)을 소유하는 비비언.  스스로의 의지로 도저히 어쩔수 없는 사랑, 매혹, 그리고 소유의 욕망을 묘사한 그림을 표지 그림으로 선택한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롤랜드 미첼과 모드 베일리를 위시한 현대의 학자들은  지식의 소유를 갈망한다.  지식욕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롤랜드와 모드는 마주치게 되고, 서서히 지식에 대한 소유욕을 넘어선 공유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인 랜돌프 애쉬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롤랜드는 우연히 발견한 애쉬의 연애편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편지의 수신인이 크리스타벨 라모트라는 애쉬와 동시대의 덜 알려진 동화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라모트의 권위자이자 후손이기도 한 모드에게 함께 연구할 것을 제의한다.  애쉬는, 브라우닝식의,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로 유명한 시인이고, 라모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레즈비언 시인으로 후세의 여성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인의 연애는 물과 기름 처럼 서로 걷도는,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애쉬와 라모트간의 숨겨진 연애 편지들은 속속 등장하고, 애쉬의 아내의 일기, 라모트의 연인의 편지등을 통해, 두 시인의격정적인 사랑의 전모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소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자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소유/가지다 뿐만 아니라, 영어의 possess 에는  "(악령따위에게) 홀리다, 미치다, (감정, 관념따위에) 사로잡히다, 지배당하다" 라는 뜻이 있다.  애쉬를 더 잘알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 잡힌 롤랜드는, 애쉬 개인 편지를 훔쳐내고 (또는 개인 소유물로 만들고), 그 편지들을 연구하지만, 연구하면 할 수록, 시인의 알려져 있지 않던 개인사를 더 깊이 알게 될수록,  시인의 작품과 업적 그 자체로 부터는 멀어지게 되어서, 결국은 시인의 독자로서의 롤랜드의 위치는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인을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역설적으로 시인의 작품으로 부터는 멀어지게 많들다니....   앞서 말한 멀린의 아이러니가 생각난다.  너무 사랑해서 모든 것을 주지만 결국 갇혀 버림으로써 그 사랑의 대상에서 실제론 멀어져 버리는 멀린의 아이러니가.

크리스티나 로제티를 연상시키는 라모트의 시, 그리고 로버트 브라우닝을 연상시키는 애쉬.  난 빅토리아 시대의 영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이 책에 등장 하는 시들과 동화, 신화에 관한 의견들은 나 같은 문외한도 "우와!"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불만족스런 점이라면, 작가가 미셸 푸코를 약간 비하한다는 느낌의 든것과 (나 만의 억측인가?), 강렬한 감흥을 주는 애쉬와 라모트의 사랑에 비해, 현대의 연인들-랜돌프와 모드-은 너무 딱딱하고 너무 감정을 숨긴다는 거다.  어쩌면 그건 작가가 의도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실체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소유의 역설을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말이다.  감정과 성을 지나칠 정도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일상화된 현대에 사는 연인들에 비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미덕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연인들이 더 강렬한 감정의 교분이 가능했다는 역설을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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