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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살아있는 동안 꼭 생각해야 할 34가지 질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백종유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앞글에 이어...)
최근에 저는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던 사람이 저만이 아니었음을,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스위스에서 태어난 한 사내도 이 질문에 주체할 수 없는 답을 쏟아냈던 것을 알게 됩니다.
루소는 프랑스 디종 학술원이 제시한 현상금이 걸린 학술과제를 보고 그 동안 자신이 공부한 지식과 경험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한 번에 머리와 가슴에 정리되는듯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출한 답이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입니다. 디종 학술원이 제시한 과제의 취지는 '학문과 예술을 다시 복원하는 일이 인간의 도덕성 정화에 기여할 것인가' 이었습니다만 루소의 답은 오히려 그 질문을 완전히 뒤집어서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불평등을 초래했고 조직과 국가를 통해서 개인의 자유는 침해 당했으니 문명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다고 문명사회의 개인들은 오히려 원시인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요. 매우 충격적인 답변이었지만 그 논리와 통찰의 깊이에 감동했는지 디종 학술원은 이 답변을 채택해서 루소에게 상을 줍니다. 루소를 한 번에 스타로 만들어준 사건이기도 했지요. 그 후에 루소는 이 책에 기초해서 발전시킨 '사회계약론'을 저술하는데 이는 너무 급진적이라고 판단해서 학술원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기초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기본 사상이 됩니다.
예를들어 국제사진협회에서 '디지털 사진이 사진의 예술적인 차원에 기여할 것인가'라는 현상과제를 제시했는데 어떤 이가 디지털 사진은 사진을 경박하게 만들었고 사진의 양적인 측면만이 강조하게 되었으니 '필름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한 논문을 제출하고 학회가 이 논문을 채택했다면 어떨까요?
루소는 전통적인 의미의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동판조각가의 조수로 일하다가 법원 서기를 거쳐 음악가로 데뷔해서 오페라를 발표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음악가의 꿈을 버리지는 못하고 음악평론가로 활동하지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또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연에서 이치를 깨우친 상당히 동양적인 학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뚜렷한 소속 학파도 없는 루소에게 여러 귀부인들이 활동 자금을 대주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말 재주가 좋으면 밥벌이는 하나 봅니다.^^ 루소라고 하면 계몽주의의 대표사상가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루소의 핵심정신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루소는 문명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인간의 이성의 힘을 강조해서, 그 이성의 힘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계몽주의와는 뭔가 박자가 안 맞는 주장 아닌가요.
이렇듯 루소는 계몽주의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를 걸쳐 모순된 괴짜로서의 진면모를 보여줍니다. 루소는 귀족부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에도 결혼은 귀족이 아닌 어느 여인과 하고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모른채 하며 자신의 집필 활동에 전념하지요. 그런 사람이 교육학에 관련된 '에밀'을 썼으니 이와 같이 모순된 행동이 어디 있는가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독일에서는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제 오십도 안 된 젋은 철학자가 출판에서는 비인기 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죠. 알라딘 서평 중에는 이 책이 뇌과학자들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악의적으로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찝집하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철학 쪽으로 깊게 공부를 안 해서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이 책의 전개 방식이나 진지한 질문과 답변은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줍니다. 오늘의 부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한가'는 이 책의 중반부에 나오는 인간의 사회성 그리고 문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한 장(chapter)입니다. 33개의 질문이 더 있으니 이 책은 앞으로도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인류로 하여금 고도의 문명을 이루게 하고 동시에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파헤친 알랭 드 보통을 만나기 위해 스위스에 한 주 더 머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