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결국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암살당한 간디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순간 이것은곧 세계를 무화시키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이 바로 다름 아닌 세계의 주요 성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방치한 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자신이나 세계에 전혀 도움을 주지않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 슈티르너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각자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자로서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을 향유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세계를 사랑하기보다 오히려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놀랍게도 세계는 더욱 사랑스러운 삶의 공간으로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세계의 부분이니, 부분이 아름다우면 전체 세계가 더 아름다워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세계의 평화는 유일자들 각각이 자신의 삶을 향유하면 저절로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 슈티르너의 주요한 관점이었다. 이럴 때라야 유일자들의 자유로운 연대, 즉 슈티르너가 강조했던 ‘국가state나 사회society‘가 아닌 ‘연대association‘ 또한 가능하게 될 것이다. 물론 국가가 부가해놓은 적과 동지라는외적 범주를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결국 유일자들의 삶 역시 환원 불가능한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예수의 방법이 원수인 적마저도 사랑함으로써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완전히 붕괴시키려고 한것이었다면, 슈티르너의 방법은 동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다시 말해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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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다!! 격하게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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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손님에게 맞춰야 하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적응해야 하는가? 하지만 몰리에르의연극은 주인이 맞닥뜨리는 훨씬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단테는손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하지만 여기에는 사람을 알아보는어느 정도의 안목이 필요하다. 어떤 손님들에게는 퇴짜를 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들이 주피터 같은 대형 사고를 칠 수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방인을 뜻하는 라틴어 ‘hostis‘가 ‘적‘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방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환대해야 하나, 경계해야 하나? 이른바 ‘제우스의 사기(이방인을 환영하라)‘라는 말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항상 정답을 제시하는 공식은 없다.

하지만 변치 않는 공식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있어 절대의무(Prime Directive, TV 시리즈 ‘스타트렉‘에서 행성연합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최상위 정책을 의미 - 옮긴이)를 위반하는 것과같다. 물론 일부 철학자들은 완벽하고, 합리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도덕적 해법의 칸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답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겠지만, 어쨌든 매우 합리적인 윤리학은 도움이 될 것이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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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칸트와 달리 리오타르에게 숭고미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된다. 그에게 재현할 수 없는 대상은 근본적으로 숭고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숭고의 대상은 자연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 세계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심지어 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숭고한 대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모든 것 혹은 지금 이 순간에나타나는 사건 자체일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믿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세계야말로 재현할 수 없으며 가장 숭고하다. 따라서 이러한 숭고한 순간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화도 불가능한 이미지일 것이다.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바넷 뉴먼 BarnettNewman, 1905~1970의 작품 <숭고는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 1950~1951이를 잘 구현한다. 어떤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 형상을 나타내는 수직선 이외에 빨간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화면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의 현실적 체험이지만 어떤 재현적인 체험도 아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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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개인‘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내다
루카치는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들추어서 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라고 보았다. 원래 루카치는 공산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 이윽고 헝가리에 공산당을 창립한 쿤 벨러 Kun Béla, 1886~1939 와 관계를맺은 이후 갑작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기 이전에이미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사상과 거의 같은 궤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징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이전의가장 중요한 저서로 손꼽히는 《소설의 이론> Theorie des Romans, 1916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루카치는 여기서 소설을 근대적인 문학 형식으로 규정한다. 루카치는 스스로를 헤겔주의자로 자처한 만큼 헤겔의 철학을 자신의이론에 적용하였다. 헤겔적 유산 중의 하나가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고대나 중세의 문학적 형식이 아닌 바로 근대적 문학의 형식으로 본 것이다.
그는 헤겔의 예술철학이 남긴 유산을 ‘미적 범주의 역사화‘라는 말로 집약한다. 미적 범주의 역사화란 말 그대로 미적인 범주들은 각각 역사적 산물로서 해당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미적 범주란 조각, 건축, 회화, 문학 등과 같은 예술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나아가 문학 내에서도 서정시, 서사시, 소설, 로망스 문학, 희곡 등과 같은 장르내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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