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환원phenomenological reduction‘ 혹은 판단중지라는 의미를 가진 에포케epoche라는 말로 후설이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의식 체험은 후설에 따르면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순수한 의식작용으로 노에시스라면 의식작용으로 구성된 대상으로서 노에마Noema가 또 다른 것이다. 노에시스가 지향성 ‘이라면, 지향된 대상을 ‘노에마‘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노에시스나 노에마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즐겨 사용하던 ‘정신‘을 의미한 ‘누스Nous‘, 그리고 ‘안다‘라는 의미의 ‘노에인Noein‘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에마가 있어서 노에시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에시스가 먼저 발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노에시스의 끝에 바로 노에마가있는 것이다. 이처럼 후설이 개시했던 현상학적 운동은 생생한 의식 체험, 지향성,
그리고 노에시스에 대한 강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할 때는 습관적으로 영위되던 친숙한 세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이 아닌가?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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