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러에게 있어서 혁명이 공포가 된 것은 혁명이 수동적 · 감각적 물질성을 구속하는 능동적·지적 능력의 모델에 항상 복종했기 때문이다. 재료에 대한 형태의, 그리고 수동성에 대한 능동성의 절대적 군림에 대한 미적 중지는 따라서 보다 깊은 혁명, 국가의 형태들뿐만 아니라 감각적 경험 자체의 혁명의 원리로 주어진다.
따라서 바로 자율적 경험형태로서 예술은 감성의 정치적 분할을 건드린다. 예술의 미적 체제는 자율적 예술과 타율적 예술 사이의, 예술을 위한 예술과 정치에 봉사하는 예술 사이의, 박물관의 예술과 거리의 예술 사이의 모든 대립을 사전에 거부하는 양식에 입각해 예술의 식별형태들과 정치적 공동체의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왜냐하면 미적 자율성은 모더니즘이 찬양한 예술적 "행위" 의 지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형태의 자율성이다. 그리고 새로운인류의 씨앗, 삶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새로운 형태의 씨앗처럼 나타나는 경험이다.
따라서 예술의 순수성과 그것의 정치화 사이의 갈등은없다. 쉴러와 우리를 가로지르는 2세기의 시간은 정반대의 현상을 보여줬다. 즉, 바로 예술의 순수성과 관련해서 예술의 물질성은 공동체의 또 다른 형상의 예정된 물질성처럼 제시될 수 있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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