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워싱’이라는 불쾌한 목적을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나 지구를 말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그게 상업을 위한 불순한 목적일지언정. 패스트패션이 지속가능성을 제창하며 옷을 수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페트병을 순환해서 옷감으로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는 일부러 광고하지 않아도 너무 진부한 비영리활동처럼 보여서 오히려 도태한 유행처럼 취급될 정도이다. 결론은 사지 않으면 된다. 티셔츠, 바지 집에 나갈 때 몸을 휘감는 그 옷조각이 우리는 부족해서 매일 새로운 옷을 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입고 나온 타인의 욕망이 나에게 비쳐서 나도 모르는 욕망을 부추기기에, 스스로만 자각하는 자존감이 겉모습을 향한 부족한 외면에 휘둘려 나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최신 유행을 좇고 있다. 먹는 음식과 다르게 하나의 옷이 어디서 출발해서 내 손으로 쥐어지게 된 지 나는 막연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알기가 힘들다. 오늘의 식사야 따져보고 고른 식재료를 통해 요리하면 어느 정도 내가 관여했다는 기록이라는 뿌듯함으로 해결이 가능하지만, 옷은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손재주를 부여하지 않는다. 기성제품으로 구성된 다양한 브랜드의 컬렉션을 통해 한 해를 어떻게 꾸밀지 고민을 한다. 옆사람이 뭘 입었는지 저기 지나가는 사람은 어떤 셔츠를,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기웃거리는 것도 부족한 나의 관점을 채우려는 방어일 뿐이다. 때문에 원단이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고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제조되었는지 관심을 둘 턱이 없다. 싸고 목적성에 맞는 이미지로 나를 완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쌓여가는 옷감이 집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집착하는 패션활동은 조금도 회한의 여지를 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분명 고쳐 입고 물려 입고했던 기억이 있는데 고장 난 기록의 메모리칩처럼 나는 과거 속으로 모든 걸 뒤로했다. 오늘 이렇게 깨달았다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의 여지를 둘 수 있다면 그걸로 일보 전진한 나의 의지에 칭찬을 보내지 않을 이유는 또 없다. 별거 아닌 생활의 움직임이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잣대도 아니고 단순히 내가 원해서 마음이 끌리기에 관심을 둔다면 나는 충분히 지구를 살리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