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글을 쓰기 위해 연신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내 노트북보다 얇은 두께의 소설을 읽었다. (심지어 이 책은 하드커버에 역자후기와 해설이 붙어있으니 그 낱장은 바람에 날아가기 쉽게 더욱더 얇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판형과 물성과는 현저하게 대비될 정도로 (과연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작가의 이야기는 엄청난 무게와 강렬함을 선사한다. 짧은 글의 구성도 그렇지만 필체의 흐름이 어찌나 빠르던지 나는 정말 한 순간에 하수구로 사라지는 머리카락처럼 작가의 글 속으로 소멸했다. 왜 이렇게 묘사가 생생한지 토통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남의 일기를 엿보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타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데, 이게 현실인지 진실인지 혹은 가상인지 허구인지 판단의 분별이 서지 않아 혼동스러웠다. 의문의 해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책 끄트머리에 마련된 지은이 소개의 분명한 문장으로 그 답변을 대신한다.
작가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프랑스의 문제적 작가로...
당돌한 문장의 강한 맺음새가 내 신경을 긁은 이유는 이와 같은 이유였다. 작가는 본인이 겪지 않은 얘기를 글로 남기지 않았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매섭게 몰아치는 글줄기가 왜 그렇게 파장을 일으켰는지 그 까닭을 나는 다시 한번 곰곰이 되짚어본다.
밑도 끝도 없이 포르노영화를 봤다는 첫 장의 고백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아니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글의 서문을 여는 걸까..) 사람은 본인의 인생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어떤 감정에 뒤엉키는 일에 삶을 맡긴다. 그 대상은 연인이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혹은 전통적인 개념에 따르지 않는 어떤 형태의 관계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 감정이 지배하는 무언의 경험을 한다. 누군가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생각하고 매달리면서 열정을 퍼부었던 적이 있었던가, 있을까, 있는가?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치가 아닐는지 자문하며 책을 끝내는 작가의 물음에 멍청한 자의식이 이성을 헤맨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사회인으로서의 구태연한 요소들이 반기를 들며 닦달하듯이 외치는 와중에 맹목적인 감정 타령이 웬 말인가 했다. 그런 황홀한 상태에 빠질지언정 타인을 밀어붙이고 나를 고통의 회한에 빠뜨리고 사랑이라는 구닥다리 정의에 가둬둘 것인가. 저울질할 문제가 전혀 아닌데 감정과 행동은 수긍하면서 이성을 짓누른다. 작가는 개인의 철저한 사적인 체험을 통해 이를 공동화했다. 자신은 이미 그 과거를 떠난 지 오래이므로 한때의 감정에서 비롯한 부끄러움과 후회에서 벗어났으며 활자와 잉크로 눌려진 종이 위의 글자들이 어떻게 타인을 자극하든 그것은 상관할바가 아니라는 떳떳함으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도 그 단순한 열정 한 스푼 떠안은 독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