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시칠리아’라는 지명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그곳이 어느 나라에 속한 도시인지, 지구 상에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몰랐다. 나름 “~리아”로 끝나는 운율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작가가 친절히 설명해준 시칠리아가 ‘이탈리아’의 장화코 부분의 작은 섬임을 자연스럽게 수긍했다. 작가에게는 오랫동안 생각해온 장소였지만 정말로 나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어떤 곳이었다.

글을 잘 쓰는 작가 때문에 당장에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행동을 부추기는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코로나 시기에 이런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고역이다. 당시였으면 짜증이 나고 불쾌한 작가의 여행기억까지도 애틋하고 소중한 추억처럼 보였다. 기차는 아무 공지도 없이 연착되고, 기차는 몇 시간을 달려도 종착지에 도착할 기미도 없어 보였으며 숙박 예약은 왜 그렇게나 복불복이던지. 작가의 기록으로부터 몇 해 지나지도 않았는데 첨단 시스템으로 무장한 근래의 온라인 세계에서는 조금도 가당치도 않을 그 과정들이 오히려 잊어버린 후회처럼 애석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렇듯 늘 편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며 달려왔지만 예상하지 못한 돌변과 불안한 내일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이 갖고 살아간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불편한 조우를 마냥 대척하면서 고집 있게 나아갈 것인지 다가오는 흐름을 받아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것인지. 작가는 이번 여행을 통해 호기심을 안고 행동으로 취하던 젊은 날의 스스로를 그리워하며 조금은 나태해져서 중년의 사내가 된 본인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다. 안주하는 가운데 느끼는 안정감이 나를 갉는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행은 그 장소, 시간을 떠나 조금은 나를 다르게 바라보는 기회를 준다. 그 때문에 일상에 익숙한 나를 새로 보려 사람들은 여행을 계획한다. 새로 보는 건 시칠리아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오랜 마음속에 담아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의 시칠리아가 되지 않을까. 스산하게 찬 공기가 대지를 덮어가는 가을의 문턱에 이른 오늘, 나는 아무 일도 없는 평화에서 새로운 모험을 하고자 했던 작가의 기록으로 마음이 동요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