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황을 겪는다. 간만에 마음을 잡고 집안 정리를 시작했는데 막상 오래된 물건 속에서 발견한 낡은 잡동사니 때문에 손이 멈춰버린 경험을. 시야를 잡아끄는 그 물건은 마치 자연스럽게 나를 물건이 이끄는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밀어 넣고 애초에 현재의 나는 무얼 하려 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과거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지금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쓸데 하나 없어 보이는 로봇만화 카드나, 낡은 열쇠꾸러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쇳조각들이 한데 엉켜있다. 꼭 그런 하찮은 것들은 제 돈 주고 살 일은 절대 없을 법한 고급 과자 틴케이스에 담겨 있고, 그 금속박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단단하게 닫혀 영원하게 내 기억들을 낡지 않게 영원히 잘 보존해 줄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된 시점의 나는 그 자질구레한 기억들을 아주 가볍게 잊어버렸고 다시 그들과 만나기에 앞서 그 존재 자체를 모를 정도로 자신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물건은 늘 많은 것을 상기시켰다. 시간 사이의 빈 여백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는 단순하게 잡동사니를 수집하던 내가 있었고 현재의 나와 연결될 아주 사소한 단서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정말 낯선 한 권인데 마치 어떤 물건이 그러했듯이 아주 쉽게 내 마음을 과거 시점의 나로 직면하게 했다. 작가는 왜 독자들을 구태여 과거로 돌려보내고 멀뚱멀뚱 세워두려 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특정한 어떤 기분에 사로잡혔다. 슬프다고 해야 할지 어둡다고 할지 모를 뭔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런 감각이 있었다. 기운은 자욱하게 깔려서 존재는 깔끔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고, 헤집고 나아가려 해도 좀체 그 기류가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글들을 곱씹는 나에게 손짓하는 무색한 내 행동만 남을 뿐 나는 여전히 맴돌고 주입된 행동을 반복하는 마네킨네코 마냥 그 감정을 계속 강요받았다. 작가는 후기에서 소설을 위해 본인의 과거와 마주해야 했으며 눈을 부릅뜨고 그동안 외면해온 그 기억들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경험이었음을 말했다. 과연 추잡하고 부끄럽고 유치하기까지 마다치 않을 그 어색한 만남을 아름답게 포장되고 왜곡된 지금 현재 상태로 남겨두지 못하고, 왜 작가는 지금에 와서 기억을 가져와 구태여 기록하려 했는지 나는 조금이나마 이 불편한 기분을 그 탓으로 해석하려 노력했다. 극히 개인적인 추억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으로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 될 수도 있었고, 곧 내가 잊어버리고 지나온 세월 탓에 켜켜이 밀봉해 놓았던 그런 기억들을 작가로 인해 억지로도 아니게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넘쳐 흘러 쏟아지게 하는 경험을 하게 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타임캡슐 같은 시간이 공평하게 있었을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가 누구였었고, 누구이며, 누구일 것일지. 삶은 정말 씁쓸하고 불공평하며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절망의 지뢰밭으로만 가득해 보였다. 그래도 그 가운데 살아가려고 하는 조금의 의지가 희망이 되고 갈피를 잡으려 애쓰는 게 이미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나는 막역하게나마 추측했다. 철저하게 외면해온 내 기억에 대한 태도가 인제 와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마치 지금에 와서는 대단한 뭔가라도 되는 듯이 과거를 평가하려 들지만, 지금의 나는 그 아무것도 아닌 혹은 그 어린아이 그대로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상태인 채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잣대를 들이밀어 또 서열화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나 자신을 대면하려 했을까. 그렇게 나는 애매하게 남은 현재와 과거가 어색하게 맞닿아 있는 감정을 껴안은 채로 어른인 척을 해왔을 뿐이었다.

나는 작가가 가볍게 재치 있는 (지금의 시대가 원하는) 그저 그런 이야기만 잘 던지다가 시류에 맞게 갑자기 잠깐 유명해질(그 때문에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었지만) 작가라고 오해했다.(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출판사의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은 작가 소개도 한 몫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정말인지 작가가 무섭게 느껴졌다. 작가가 아직 보여주지 못한 앞으로의 깊이와 행보가 너무나도 멀어 보였고, 그건 독자로서 단순하게 너무 궁금하고 기대될 뿐이라는 감상밖에 못 남길 정도로 그저 막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캔모아’니, ‘비기 알 요금’이니 문득문득 던지는 낯설지 않은 워딩에서 나는 작가와 동시대를 조금이나마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단순하게 기뻤다. 이 작품은 개봉을 세 차례나 연기하면서까지 개봉한 세계적인 블록버스터나, 어떤 저명한 상을 받았다는 문학 작품들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올해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대단했다. 이렇듯 나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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