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의 기적>은, 오히려 베른에서 있었던 '기적'이 그저 아무렇게나 갑자기 일어난 사건만은 아니었음을 강변하는 듯한 영화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베른에서 있었던, 서독의 기적 같은 승리를 다룬 이 영화는 서독이 기적을 쟁취하는 과정에 있었던 작은 사건들을 연결시키면서, '기적'이란 한 개인에게서 한 가족에게로, 나아가 축구 국가대표팀과 국가로까지 전이되는, 마치 작은 물결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듯한 일련의 흐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기에 베른의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奇蹟'이었다기보다는, 차라리ㅡ그 이전의 소소한 기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ㅡ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알리는 경적, 즉 '汽笛'과도 같았다.

영화는 1954년의 월드컵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면서도,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삶을 나란히 들여다본다. 러시아에서 전쟁포로로 지내다 십여 년 만에 살아 돌아와서는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 불안해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조금은 어색하게 맞아들이는 가족은 당시 패전국이었던 서독의 음울하고 불안한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색빛 정서는 전범국이란 낙인 아래 4년간 국제대회 참가자격을 박탈당해야 했던 국가대표팀에도 만연해 있고, 이것은 그들이 8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여 조별예선에서 헝가리에 8대3으로 대패 했을 때 극에 달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될 것이라는 패전국의 패배의식과 자조감은 개인과 가족과 국가, 이 모두에게 무겁게 쌓여만 간다.

하지만 끝내 '기적'이 벌어지기까지, 전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년이 아버지의 작은 조언으로 동네 축구경기에서 활발한 몸놀림을 보일 때, 혹은 아버지가 홀로 축구공으로 저글링을 하다가 오버헤드킥을 하기 위해 허공에 몸을 누일 때, 혹은 맑았던 하늘에서 돌연 비를 내리기 시작할 때, 또는 결승에서 헝가리에 0대2로 뒤지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독을 향한 응원이 경기장에 메아리 칠 때, 그리고 소년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결승전이 열리는 베른에 마침내 몸을 나타냈을 때, 드디어 작은 물줄기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거대한 '기적'으로 분출했다. 기적은 개인과 가족에게로, 또한 축구 국가대표팀과 국가로까지 면면이 이어졌고, 그런 이유로 '기적(奇蹟)'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이후에 서독이 경제적으로 부흥했다는 엔딩의 내레이션이 시사하듯, 앞으로 다가올 화합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기적(汽笛)' 소리였을 뿐인 셈이다.

개인과 가족에게서 벌어진 작은 화합과 기적이 어떻게 국가의 화합과 기적과 공명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다룬 이 영화는 그저 뭉클한 가족영화로만 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1954년 월드컵을 배경으로 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몇몇 세밀한 에피소드들 덕분에 <베른의 기적>은 축구팬들에게 더욱 어필한 만한 영화가 되었다. 아디다스 축구화가 도약의 시기를 맞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나사식 뽕과 관련된 일화나 "축구공은 둥글다."는 축구계의 유명한 격언과 관련된 일화, 또 '헤르베르거의 악마적 계산'이 잉태된 헤르베르거 감독의 고뇌 등, 축구의 역사에서 흥미로웠던 순간들이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특히 당시 서독 경기를 세심하고 현실감 넘치게 재현한 것은 가히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여러모로 <베른의 기적>,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마냥 기적만을 바라는 축구팬들에게 더욱 권할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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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2010년 새해 독서계획을 알려주세요. 적립금 100만원을 쏩니다!

간단한 문제 하나ㅡ'새해 계획'을 다르게 표현하면? 별로 자랑은 아니지만, 내 경우에는 '연말 반성문'이 정답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전자와 후자에는 몇 글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내용은 거의 같아서, 이를테면 이렇게 짝지어서 나타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새해계획ㅡ연말 반성문 : 배에 왕자를 새기자ㅡ배에 왕자를 못 새겼다,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보자ㅡ일본어 공부는 다음에 시작해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ㅡ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등등. 그러니까 결국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말에 반성문 따위를 써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애초에 새해 계획 따위를 세웠기 때문이고, 말할 필요도 없이 이건 바보같은 짓이다. 새해 계획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연말의 반성문만 구접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애시 당초 올해는 좀 더 연말의 반성문을 고려해서 계획을 세울 참이었다. 가령, '올해 로또 1등 당첨금은 타지 않겠다.'랄지, '월드컵을 보러 남아공에는 가지 않겠다.'랄지, '포루투갈어는 절대로 배우지 않겠다.' 등. 범위를 좁혀 굳이 '독서계획'으로 한정해서 말해도 비슷하다. 나는 2010년이 시작되고서도 여전히 방구석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책들을 둘러보며, 몇 년 전 삼촌이 꼭 읽어보라며 건네주신 <禪의 황금시대>를 올해도 읽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물론, 가끔 만날 때마다 책을 선물해 주시는 삼촌의 호의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지만, 삼촌의 취향과 내 취향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게 그 책을 읽지 않기로 한 첫 번째 이유이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역시 그 책을 읽겠다는 확고한 결심은 나중에 가열찬 자기반성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게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이건 그 책의 서문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연말의 반성문은 가벼울수록 좋은 법이니까(삼촌, 미안!).

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연말 반성문만을 의식해서 새해의 계획을 오로지 부정적,소극적인 것들로만 채워 넣는 건 역시나 내키지 않는 일이다. 모름지기 새해란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접근해야 마땅하거니와, 기실 그것이 그 놀라울 만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새해 계획'을 '연말 반성문'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일 테니까. 더욱이 솔직히 말해서, 중대하고 거창한 것이 전혀 아닌, 그저 한 달에 한 권쯤 읽을 책들을 미리 선정해두는 것으로 족한 독서계획은 대단히 흥미롭고 또한 자극을 주는 일이다. 읽고 싶은 책들은 널리고 널렸고(어디까지나 마음만), '계획'이란 적어도 그 시작만큼은 본래 의욕과 즐거움이 가득한 법이므로.

아래의 리스트는 그래서 계획된 것이다. 한국 성인의 평균 독서량을 높이는 데에 별 기여는 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적어도 평균을 까먹지는 않을 수준으로 '널널'하게, 그리고 새해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기대와 희망으로 '과감'하게, 하지만 또한 연말에 대한 일말의 우려와 자제로 '적절'하게. 그리고, 그렇기에 이 새해 '독서계획'의 주제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2010년 '독서계획'ㅡ이것은 2010년 '연말 반성문'이 아니다." 뭐, 언제나 연초에는 적당한 정도의 치기가 쉽사리 용서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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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삶
폴 호프만 지음, 신현용 옮김 / 승산 / 1999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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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2010년에 처음으로 집어든 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한 미친 수학자에 관한 이야기이고, 조금 더 성의 있게 말하자면 진지하고 유쾌하며 또 종종 경이로운 수학자들의 삶과, 그들이 다루는 수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해를 시작하는 책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하다.
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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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월 - "시베리아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경이다." 며칠 전 시베리아에 관한 TV프로그램에서,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경이로움은 비단 시베리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0년이 시작되고도 여전히 새로울 것 없이 살아가는 2월, 이 책을 읽는 일은 어쩐지 또 다시 위로와 용기를 안겨줄 것 같다.
어퍼컷- 신성 불가침의 한국 스포츠에 날리는 한 방
정희준 지음 / 미지북스 / 2009년 11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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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이 책이 얼마나 흥미로울지는 큰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제1부 위대한 영웅, 불편한 진실'이랄지, '제2부 금메달 뒤에 가려진 괴물의 얼굴'이랄지, '제3부 아, 올림픽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랄지, '제4부 스포츠적인, 너무나 스포츠적인' 등. 각 '부'에 실린 소제목들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팔리 모왓 지음, 곽영미 옮김, 임연기 그림 / 북하우스 / 2005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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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월 - <울지 않는 늑대>를 읽고 팔리 모왓의 글에 반했었는데, 그의 다른 책을 읽는 일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4월 즈음에는 마음먹고 그의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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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종종 TV의 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는 마치 인간성이 상실된 듯한, 난폭하고 잔인하며 무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낮에는 마냥 좋은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사람이 밤에 술을 마신 후 돌변하여 아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든지, 어느 10대가 강남에서 살기 위해 엄마와 누나가 집에 있을 때 후배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든지, 아버지가 의붓딸 혹은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했다든지 등등. 이런 일들은 물론 끔찍한 일들이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는 무관하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고 또 그래야 마땅한 일이라는 의미다. '나'의 도덕률(혹은 '나'가 모인 '우리'의 도덕률)로 재단할 때, 그런 일들은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결국 그 일들은 일어났다는 게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거짓말 하나 - '나'는 '나'가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에서는 온갖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쌍둥이인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가 함께 쓴 '비밀노트'에는 도둑질이나 폭력에서부터 살인과 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이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 의해 그대로 자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 통에 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할머니의 온갖 폭언과 구박에 시달리고, 선과 악의 혼돈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이 은밀히 숨겨져 있고, 작가는 이러한 비밀들을 감정을 배재한 채 지극히 담담하고 간결한, 그러나 대단히 매혹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물론 '우리'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일들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각각 2부와 3부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을 통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기록들은 허구로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은밀한 '비밀(혹은 욕망)'들이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다는 데에 있다. 추악한 비밀들을 그저 숨겨둔 채 겉으로만 달리 행세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나'만이 그대로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쌍둥이들을 작중 화자로 내세워 '우리'로 서술한 것은 어쩌면 이렇듯 의식 속에 감추어둔 비밀과 행동의 이중성을 의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모순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듯하다.

거짓말 둘 - '너'는 '너'가 아니다 

2부인 '타인의 증거'에서는 유독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를 증거 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불구의 몸을 지닌 소년은 잘 생긴 금발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추악한 용모와 불구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서점 주인은 누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누나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동생이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반드시 생존해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며,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의 잔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각기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타인'으로서의 그들 각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의 실존을 규정짓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서점 주인 빅토르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묻는다.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모든 생존과 죽음은 '나' 스스로의 의식과 결정으로만 비롯되지 않고,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주체는 오히려 '타인'이다.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며, 혹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기를 원하며 '나'는 '타인'의 존재에 매달린다. '그들이',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유달리 굵은 글씨로 표시된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 속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식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며, 이러한 타인의 존재 속에서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되는 듯하다. '너'는 그저 '타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속박한다는 것을. 그것은 태생적으로 '나'와 구분되어야 할 '너'라는 존재가 지니는 모순처럼도 보인다. 요컨대, '너'는 그저 '너'가 아닌 셈이다.

거짓말 셋 - '나'는 '너'가 아니다 

3부인 '50년간의 고독'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했던 사실들은 모호해지고, 모호한 듯하던 것들이 도리어 사실처럼 밝혀지기도 한다. 거짓말들이 쌓이고 모순은 중첩되며, 와중에 의미는 풍성해진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단어로 3부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부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또한 3인칭의 어느 '이름'이 아닌 '나'(클라우스)가 화자가 되는데,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분화된 혹은 단절된 쌍둥이의 의식 상태를 의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단절을 조금 확장하면, 결국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제가 '세 번째 거짓말'인 3부에서 세 번째 거짓말은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아이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클라우스가 다시 멋대로 바꾸어 읽어주는 편지에는 잔인하고 냉정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내가 원하는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도 똑같이 공유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서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라와 클라우스의 감정도, 루카스를 끊임없이 미화시키며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감정도,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루카스의 바람도 그래서 진실과는 멀어진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와는 다른 까닭이며, 이러한 '단절'은 현실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우리는 자유다."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냉소적인 은유로도 읽힌다.

진실 하나 -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책 뒤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해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체험들이 먼 이국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하나 같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의 체험에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은밀하게 자리한 추악한 비밀과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폭력과 근본적인 단절로 인한 고독 등, 인간의 존재가 초래한 그 어떤 일이든(혹은 그 어떤 거짓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그러한 체험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헝가리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 마자르 격언에는 'Temetni tudunk'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 10개로도 완전한 번역이 어려운 이 말은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까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물론 되풀이된 헝가리의 폭력과 파괴의 역사 속에서 끌어올린 이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의 존재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이 격언은 어쩐지 요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격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설령 그 세 가지 거짓말이 얼마나 참혹하고 적나라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까. 그 진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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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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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스퍼프가 마침내 스머프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 스머프든 저 스머프든 죄다 엣지 없이 흰색 두건과 흰색 바지(?)를 착용하고 있다거나 혹은 모든 집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버섯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못 봐줄 노릇이지만, 특히 항상 가가멜과 아지라엘의 위협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는 낙관과 평화가 넘쳐 흐르는 스머프 마을은 분명 투덜이 스머프가 마음에 쏙 들어할 마을은 아닌 탓이다. 좀 더 다채롭고 엣지 있는 패션과 창의적이고 다양한 집들이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적당한 흥밋거리와 자극이 있으면서 또한 풍요와 평화가 공존하는 마을을 찾으려는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은, 그러니까ㅡ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ㅡ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난데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가정해보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제목 그대로 빌 브라이슨의 미국 여행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여정은 마치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난다면?'하는 가정을 꼭 현실에 적용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고향마을에 대한 미묘한 불만을 감지하게 하는 빌 브라이슨은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와, 이른바 "재발견 여행"을 떠나며 모든 것이 완벽한 마을(일명 '모아빌')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 여행은 그가 어린 시절의 가족여행으로부터 얻은 추억을 다시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들과 '농부의 선탠'으로 표식을 삼는 남자들이 있는,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기만 한 아이오와와는 다른 이상적인 마을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빌 브라이슨의 여행은 영락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연상시킨다.

투덜이 스머프, 아니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의 경과는 짐작할 만한 그대로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 대부분의 주를 차로 2만 2496킬로미터를 달리며 여행하지만, 그가 바라던 '완벽한 마을'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행에서 그가 지나치는 수많은 마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투덜거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듯한, 독특한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들과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싸구려 관광지로 변하거나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들이 조소와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그의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낭만과 즐거움과 매력 역시 종종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현현하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결코 특유의 유머를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물론, 때로는 빌 브라이슨이 구사하는 유머가 지나치게 과격한 탓에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언사들과 그가 둘러본 마을과 유적지 등에 대한 일방적이고 과장된 평가는 이 책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브라이슨의 무례함을 결국 웃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건, 능글거리며 불평이나 토해내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를테면,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한 강도 높은 힐난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한 '자유의 기수'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확고한 비판의식 등, 이러한 대목에서 빌 브라이슨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는 불평으로 일관하던 그가 자연의 순수한 경이로움과 잘 보전된 역사의 가치에 대해 찬탄을 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설령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날지라도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불만 끝에 언제나 "하지만 아기 스머프는 좋아."라고 덧붙이던 투덜이 스머프의 말에서 아마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 또한 그렇다. 비록 여전히 아이오와의 디모인은 결코 '완벽한 마을'은 아니지만 그가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진정어린 환대와 편안함으로 맞아준 건,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고향집이 있는 아이오와의 디모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곳은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가 있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분위기가 있는, 단조롭고 지루하기도 한 곳임을 빌 브라이슨은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리운 추억과 느긋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이곳이야말로 그가 찾아 헤매던 마을이었음을 빌 브라이슨은 긴 여행 끝에 비로소 따뜻하게 자각한다. 그리고 기실, 이러한 따뜻함이야말로 거침없는 불평과 비판 뒤에 가리어진 빌 브라이슨의 진면목이며, 또한 이는 내가 빌 브라이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을 조금 말하자면, 이 책은 20년 전에 이미 발간된 것으로 이 책이 다루는 미국은 아무래도 오늘날의 미국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보다는 이 책이 흥미가 조금 덜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책들은 모두 일정 부분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서 그러한 부분들이 엮이는 재미가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이 있음을 얘기하는데 그게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에서 번복된다거나, 혹은 이 책에서 종종 회상되는 그의 가족 얘기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에서 구체화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며,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은 가정이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보다는 역시 빌 브라이슨의 여행 쪽이 좀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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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남의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분명 초딩이나 할 법한 짓이지만, 그게 비극의 주인공 줄리엣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조금쯤 다르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름 따위,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개뼉다귀 같은 이름이라도 상관없지만, 하필, 이름이 다른 무엇도 아닌 '로미오'라는 게 유일하고도 중대한 문제가 될 때도 있는 법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로미오'라는 이름 자체가 문제인 건 전혀 아니다. '로미오'를 둘러싼 가문과 환경과 배경 등,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그 이름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데 근간을 이루어온 모든 것이며, 또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택했고, 그들의 이름이 지닌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죽었다. 하지만 너무 심란해할 필요는 없다. 이 비극은 이름이 지닌 무게로 인한 필연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운이 좀 많이 나빴을 뿐이다.

만약 이름의 무게가 필연적으로 비극을 잉태한다면, 브라질의 유쾌한 로맨틱 영화인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는 필경 비극으로 끝나야 마땅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브라질 축구 클럽 팔메이라스의 팬으로 운명 지워진 줄리엣이(심지어 이름조차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라, 팔메이라스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어진 것이다!), 역시 운명이 코린티안스(팔메이라스의 라이벌)의 팬으로 점지한 로미오와 결혼을 한다니, 그게 어디 눈곱만치나 행복하게 끝날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제목에서 결론을 내 버리는 이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을 추구한다. 비극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데서 짐작되듯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지닌 무게도 역시나 무거웠지만, 그들은 그 무게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리하여 결혼에 골인했다. 그렇다. 이 희극은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경우다.

이미 대충 영화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알고 있고 결과 또한 안다면, 이제 관건은 '축구'라는 소재를 이용해 영화가 원작을 어떤 식으로 변주하는가에 있다. 영화는 축구의 라이벌 구도를 적절히 배합하고 실제 축구경기장의 모습을 차용하면서,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꽤나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물론 당연히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법한, 사랑을 선택하면서 서로의 이름이 지니는 무게를 감당하려고 하는 연인의 노력만큼은 빠지지 않아서 각각 팔메이라스와 코린티안스의 열성팬인 줄리엣과 로미오가 상대팀을 인정하려는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흥밋거리다. 이를테면, 한눈에 반한 연인 줄리엣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을 팔메이라스 팬이라고 속이며 팔메이라스 엠블럼이 선명한 줄리엣의 침대에 몸을 누이는 로미오의 모습이라든지, 이미 로미오의 거짓말을 아는 줄리엣이 팀에 대한 충성과 연인이 사랑하는 팀에 대한 증오로 번민하는 로미오에게 코린티안스 엠블럼이 새겨진 콘돔 하나를 건내는 모습 등. 서로의 이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두 연인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줄리엣의 절절한 애원에 대한 유쾌한 변주로도 손색이 없다. "단지 저와의 사랑만을 맹세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케퓰렛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쓰지 않을 거에요."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라이벌 팀마저 기꺼이 품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사랑은 더 큰 시련과 필연적으로 마주한다. 영화는 팔메이라스의 열혈팬인 줄리엣의 아버지와 코린티안스의 팬임을 숨긴 로미오 사이의 긴장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늘어놓다가 모든 것을 일거에 터뜨려버린다. 그동안 예비사위를 자못 마음에 들어 하던 예비장인은 일변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가 비극과 다른 결말을 향하는 건 앞서 말했듯 역시 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걸로 뭔가 좀 미진하다고 생각한다면 영화의 엔딩과 함께 나오는 내레이션을 한 번 음미해 볼 만하다. 대단히 감동적이라거나 끝내주게 멋진 문구는 아니지만, 나름 그럴 듯해 보이는 그 문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사랑으로 초래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이름이 뿌리 내린 공고함에서 벗어나 상대의 이름 뒤에 자리한 상이한 모든 것들을 용기 있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결국 평화와 행복은 그 과정 끝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사랑의 결실인 셈이다. 뭐 물론, 운이 아주아주 나쁘다면 그저 명복을 비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음을 잊어선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늘 사랑한다면 그 공간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사랑은 불을 녹이고 얼음을 태웁니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폭풍으로 변화시켜서 바다가 넘치고 집이 무너지고 나면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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