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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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거실 베란다 가까이 티비만 한 어항이 있었다. 집에 들어오면 가방을 내던지고 식탁 의자를 질질 끌어 올라앉아 어항에 코 끝을 붙였다. 지느러미가 공작새같던 열대어가 물 속에서 너울거리는 모습을 넋이 빠져라 보다보면, 서쪽 끝으로 기울어진 햇빛이 어항을 통과해 불 켜지 않은 거실 깊은 안쪽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공기중에 떠다니는 먼지들, 저녁의 붉고 노란 빛, 식지 않은 여름의 마지막 열기와 놀이터의 시소가 내는 금속마찰음. 그제서야 어항에서 얼굴을 떼고 식탁 의자에서 내려왔다.
어느 봄인가 초여름인가, 아빠는 수초 한봉지를 어항 속에 풀어놓았다. 그날 처음으로 어항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수초는 개구리밥처럼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어빠가 내 머리 위에서 물에 몸을 맡기고 편안하게 떠있는 채로 사는 식물이라서 부상수초라고 말했다.
아빠 식물이 물 위를 덮으면 물고기가 숨이 막히지 않을까.
아니야. 물고기한테 그늘을 만들어주니까 쉴 수 있어서 좋지.
그럼 물고기가 저 식물들 뿌리를 뜯어먹으면 다 죽을텐데 어떡하지?
뿌리가 자라면 물고기가 저 사이에 숨어서 쉴 수 있거든. 자기만의 비밀장소를 왜 뜯어먹겠어.
그래도 다른 풀들처럼 한 자리에 있지 못하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정아. 물 속에선 온 몸에 힘을 꽉 줘야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어.
수영장 바닥에 앉아 가만히 있으려면 갈비뼈가 부들부들 떨리도록 온 몸에 힘을 주어야 했으니까 식물도 그런가.
그 날 이후 식탁 의자에 올라서서 어항 위를 내려다 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항 윗쪽을 잡고 서면 손 끝으로 여과기의 진동이 웅웅웅웅 타고 올라왔다. 산소발생기에서 나온 공기방울이 흔들흔들 올라와 초록 수초 잎을 쿡쿡 건드렸다. 물이 일렁거렸고 녹색의 수초 사이로 전복 껍질을 닮은 오색의 물고기 꼬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앞에서 보는 어항은 늘 조용했는데, 위에서 본 어항은 흔들흔들, 한 순간도 고요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물고기도 쉴 곳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뿌리 사이에 몸을 끼우고 쉬는구나.
학교에서 돌아오니 며칠동안 어항 구석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던 물고기 하나가 배를 뒤집고 물에 떠있었다. 몽땅 까만데 배만은 하얗게, 아니 뿌옇게 부풀어서 수초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떡하지. 아빠가 없는데.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 까지 배를 뒤집은 물고기는 물 위에 떠있다가 물살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한 구석에 가라앉았다. 수초 뿌리가 물고기를 가릴만큼 자라지 않아서 물고기 몸에서 검은색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도 볼 수 밖에 없었다.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는 동안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가 왔고, 물고기가 저기 있다며 울었다. 별 일 아니라고 했고 아빠가 돌아온 집은 예전과 같았다. 다만 어항 물이 탁해져서 햇빛이 비춰도 무지개가 생기지 않아 거실 깊은 모서리가 어둑어둑했다. 죽은 물고기의 까만 색깔이 물에 녹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 이 기억은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면 아래 잠긴 우경과 해인을 위해 문장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담은 문장 사이사이 뒤엉킨 두 사람의 슬픔이 물고기 꼬리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할 그들의 고통이 대단할 것 없는 풍경 (<별 일은 없고요?>, 이주란 - 시티픽션, p.132 ) 속에서 대단한 일도 아닌(p.30) 일상을 거치며 서서히 분해된다. 애쓰지 않으면서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극적인 장면도, 대단한 플롯도, 격정적인 감정 표현도 없다. 정말로 온 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떠서 뿌리를 내려가는 부상수초를 닮았다.
​그래서 어항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듯 행간을 살피며 책장을 넘기면 마음이 일렁인다. 위에서 내려다 본 어항처럼 흔들흔들, 무수한 감정들이 일상의 편안한 파동을 타고온다.
꿈꿨니?
이모가 물었고
네.
대답했다.
어떤 꿈을 꿨니?
아쉬운 꿈이요.

-p.186
덕분에 꿈같던 풍경 하나를 기억해냈다.
정말,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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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페이지까지 읽고 <시티픽션>에 수록된 단편 <별일은 없고요?>를 단번에 떠올렸다. 어?? 같은데?? 하고 책장을 뒤져보니 역시 같은 작가.
문장과 문장 사이를 살필수록 보이는, 이주란 작가만의 결이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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